제271회 의로운 과정
2021년 1월 24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5절~6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ローマ人への手紙3章5節~6節
“5.では、もし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のなら、私たち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御怒りを下す神は不義なのでしょうか。
6.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もしそうなら、神はどのようにして世界をさばかれるの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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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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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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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9번째 시간으로서 “의로운 과정” 義なる過程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계속해서 바울의 자문자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소설을 읽듯이 본문을 보게 된다면 조금 혼란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 구성이 문법적으로 조금 난해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평소처럼 하나하나 살펴가면 충분이 이해할 수가 있고, 이 말씀에서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통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될 경우에는 종종 현대인의 성경을 인용하기도 합니다만, 오늘 이 본문에 대해서는 개역개정이나 현대인의 성경이나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본문이 어려운 이유가 단어에 있지 않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문장 구성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중에서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5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では、もし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のなら、私たち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御怒 りを下す神は不義なのでしょうか。

여기에 보면 <불의>와 <의>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우선 이 단어들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문장을 좀 쉽게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의한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나게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그러면 여기서 단어도 조금 바꾸어서 말씀 드리면 다음가 같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당한 행위가 하나님을 의롭게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부당하시냐”

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 되시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 즉 <우리의 부당한 행위가 하나님을 의롭게 한다>라는 것이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시편 145편 1절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私の神 王よ 私はあなたをあがめます。 あなたの御名を 世々限りなくほめたたえます。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송축하겠다, 찬송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が形造ったこの民は、わたしの栄誉を宣べ伝える。

그리고 이사야 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은 정해졌지요? 우리는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우리 삶의 목적이 정해졌다면, 다음은 그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밟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의 직접적인 뜻은, 앞을 보고 걸어가든, 게처럼 옆 걸음으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뜻으로서,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애초에 정한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어에도 이런 말은 있지요. 結果オーライ 終わり良ければすべて良し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끝이 좋으면 다 좋아》<終わり良ければすべて良し>는 셰익스피어 희곡 제목이기도 합니다만, 이 뜻도 역시 최종적인 결과만 좋다면 그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의 삶의 목적 이야기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항상 말씀 드리는 바와 같이 믿음과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 말씀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한 행함으로 이어져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행함에는 많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행함이란 예배도 있겠지요..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는 것이 예배입니다.

한국사람들은 흔히들 성수주일이라고 해서 주일인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은 토요일이에요. 그래서 이 말씀 때문에 지금도 일부 교회에 따라서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진정한 예배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이는 성경적으로 볼 때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안식일 다음 날, 그러니까 토요일 다음 날인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요일에 모임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지금 일요 예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안식일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토요일에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이는 마치 구약의 모든 규례들을 지금도 지켜야 한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제사를 지낼 때도 구약의 율법처럼 양이나 염소를 가져다가 불로 태우면서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남자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 외에도 구약에 적힌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이 됩니까.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가 되고 말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식일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들이 지금도 할례를 받는다거나 짐승들을 끌어다가 불로 태워서 제사를 드린다거나 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구약의 다른 건 안 지키면서, 안식일이 토요일이니까 그것만 지키면 된다? 이건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는 일요일에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인가요? 우리가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고 해서 주일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주님의 날이 아니라 사람의 날이에요?

아니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20절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まことに、もう一度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あなたがたのうちの二人が、どんなことでも地上で心を一つにして祈るなら、天におられるわたしの父はそれをかなえてくださいます。
二人か三人がわたしの名において集まってい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のです。」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계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모였을 때만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다만 관행상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지, 월요일이든 화요일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주님은 그 예배를 언제든지 기쁘게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데에는 예배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에베소서 1장 22절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また、神はすべてのものをキリストの足の下に従わせ、キリストを、すべてのものの上に立つかしらとして教会に与えられました。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회사는 사장님이 주인일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의 머리는 오로지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회사들 보면 참 다양합니다. 하는 일도 다양합니다만, 그 회사가 추구하는 모습도 다양하지요. 그 이유는 그 회사의 주인인 사장님이나 경영자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돈을 번다는 것만 아니라 그 회사의 주인마다 경영방침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기업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머리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영방침을 따라야 합니다.

그 경영방침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 성경이 되어야 하겠지요. 모든 교회가 100% 처음부터 끝까지 같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대원칙인 이 성경에서 벗어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를 물질로나 봉사로 섬기는 일 또한 하나님을 높이는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렇죠. 하나님 말씀, 예수님의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전하는 것 또한 주님을 높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먼 곳에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저도 여러 방법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럴 때 보면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위로와 격려를 받을 때가 있나 하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심한 말을 들을 때도 있지요.


이와 같은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뒤따르는 일들은 많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도 주님께서 기억해주시고 힘을 주시고 축복해주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에 오늘도 한 걸음을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우리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에 있어서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예배나 헌신이나 전도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높이는 일은 의로운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한다고 하면서 그 과정에 불의함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역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結果オーライ 終わり良ければすべて良し>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5절~6절
“5.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5.では、もし私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のなら、私たちはどのように言うべきでしょうか。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御怒りを下す神は不義なのでしょうか。
6.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もしそうなら、神はどのようにして世界をさばかれるのですか。”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알기 쉽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하나님을 높이게 할 수 있다고 할 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부당하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만약에 하나님이 부당하시다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느냐”

5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私は人間的な言い方をしますが)>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불의하다(神は不義である)>라는 표현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검은 것은 하얗다>, <선한 것은 악하다>라고 하는 전혀 말이 안 되는 표현이지요.


이처럼 성경적으로 보면 어불성설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불의하다(神は不義である)>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하나님을 높인다> 이는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기 쉬운 사건을 한 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작년 2020년 10월에 한국에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기도의 어떤 사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만, 한 1년 전쯤부터 어떤 사람이 그 사찰에 와서는 할렐루야,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하고, 사찰의 현수막에 불을 붙이기도 하고, 종을 치려고 하면 그 종을 못 치게 방해를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결국 작년 10월에는 그 사찰에 불을 붙여서 건물 모두를 불태우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이 이 사람을 체포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신의 계시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났습니까.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실 의외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문화재관련 책을 읽어보니까, 거기에 의하면 어느 사찰에 가보았더니 그 사찰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 위에 누군가가 십자가 모양으로 낙서를 해놓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이, 아,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겠습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 종교들을 바라보게 된다면, 이는 성경적으로 문제가 많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리 사람 사이에 있어서도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맺어진다는 것은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 사이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간음이라고 하겠지요. 왜 이를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가 하면, 이는 바로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배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あなたは、ほかの神を拝んではならない。主は、その名がねたみであり、ねたみの神であるから。


성경에서 간음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역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신들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을 한다는 일은, 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배신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철저하게 금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우상숭배는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수 천년 동안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로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다른 종교행위를 불법적으로 방해하거나 종교시설을 불법적으로 훼손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불의를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를 내리신다고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세상의 법률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느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용의자 중에서 어떤 사람이 대단히 수상하게 여겨졌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어요. 그래서 하루는 경찰이 그 집에 몰래 들어가서 방을 뒤졌는데, 그 용의자 집에서 그 살인사건에 쓰였던 흉기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 흉기에는 피해자의 피가 묻어 있었고 용의자의 지문도 찍혀 있었어요. 이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를 증거로 해서 이 용의자를 교도소에 보낼 수 있을까요? 아니요. 없습니다. 정말로 그 용의자가 틀림없는 범인이었다고 해도, 그 증거를 가지고는 이 용의자를 교도소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경찰이 아무런 영장도 없이 몰래 그 집에 들어갔다고 하는 행위가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건에서 범인을 체포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로운 일입니다. 정당한 일이지요. 그리고 이를 위해서 다양한 수사방법이 도입되어야 하겠습니다만, 아무리 진정한 증거와 진정한 범인을 밝혀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도 불법적인 행위가 있었다면, 결국 범인체포라고 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 사이에도 보면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일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선물 중에서 가장 기뻤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마음만으로 족해요? 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솔직히 눈에 보이는 선물을 안 받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뭐, 사람마다 취향은 각각이라서 단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여러분께서 생일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아서 기뻐했던 그 선물.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물은 이 사람이 산 것이 아니라 어느 가게에서 몰래 훔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속여서 얻은 돈으로 산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여러분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의로운 결과를 위해서는 그 과정 역시 의로워야 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40절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あなたは心を尽くし、いのちを尽くし、知性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主を愛しなさい。』
38.これが、重要な第一の戒めです。
39.『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40.この二つの戒めに律法と預言者の全体がかかっているのです。」

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부분은 바로 39절 앞부분 말씀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뒤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사이를 잇는 것이 39절 전반부 <둘째도 그와 같으니(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입니다.

이는 무엇이냐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보다는 못하지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만큼 중요한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불완전한 신앙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만 사랑하는 것도 불완전한 신앙입니다.

그러면 불완전한 신앙이란 100점 만점에 50점이라는 뜻이에요? 아닙니다. 불완전한 신앙은 50점도 40점도 아닌 0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또한 이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웃>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 믿음의 형제 자매는 물론이거니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다른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전해지겠습니까. 비록 그 사람들이 성경적으로 보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가진 물건을 강제로 빼앗고, 훼방을 하고, 불을 지르고 하면, 그 사람들이 회개해서, 아, 예수님을 믿어야겠구나 할 것 같습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오! 잘했다 충성된 종아! 그런다고 하십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불의한 행동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진노를 내리신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불의가 아닙니다. 불법이나 부당함도 아닙니다. 불의나 불법이나 부당함은 문제 해결에 있어서, 복음 전파에 있어서 그 어떠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로마서 12장 21절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그렇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선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은 악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의한 의로운 과정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하나님을 높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온 전하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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