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회 우리의 자랑
2021년 2월 28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7절~28절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ローマ人への手紙 3章 27節~28節
“27.それでは、私たちの誇りはどこにあ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取り除かれました。どのような種類の律法によってでしょうか。行いの律法でしょうか。いいえ、信仰の律法によってです。
28.人は律法の行いとは関わりなく、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と、私たちは考えている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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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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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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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23번째 시간으로서 “간과해주시는 은혜” 見逃して下さる恵み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네 구절의 말씀도 앞의 두 구절과 뒤의 두 구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의 경우는 앞의 두 구절이 중심이고, 뒤 두 구절은 앞의 두 구절에 대한 보충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중심이 되는 오늘 앞의 두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24.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예전에 제가 들었던 이야기입니다만, 옛날에 나폴레옹 장군이 전쟁을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한 부하가 전쟁 보고를 왔는데 그 문장이 너무나도 길었대요. 그래서 나폴레옹이 그 부하한테 말하기를, 아니, 지금 전쟁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긴 보고서를 쓸 시간이 어디 있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이 부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보고서를 짧게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어쩌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글을 짧게 쓰는 것보다 길게 쓰는 편이 훨씬 더 시간이 많이 들 것 같습니다만, 이 부하는 오히려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글이나 말을 길게 하는 것보다 짧게 하는 편이 더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리게 됩니다.

가끔 제게 메일을 보내주시는 분들을 보면 격려의 말씀, 은혜로운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만, 어떤 경우를 보면 그 외의 다양한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뭐, 괜찮습니다. 굳이 지금과 같은 코로나가 난리를 치기 전이라 하더라도 세상살이를 보면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 스트레스를 제게 보내주시는 메일로 푼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보면 뭐라도 지적을 좀 하고 싶으셨나보죠? 예전에 받아본 메일에 보면 제가 설교를 하는데 원고를 읽는다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분도 계셨습니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대부분의 목사님들께서 말씀 준비를 하실 때에는 원고에 간략히 요점만 적으시는 분들도 계시거나, 아니면 아예 원고를 안 보시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저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다 적습니다.


사실 제가 신학을 하기 전에 학원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만, 그 때 팟캐스트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학원 쪽에서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제안을 듣고 제하 처음 한 말이 뭐였냐하면, “팟캐스트가 뭐예요?”였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알고 보니까 인터넷에 주로 스마트폰으로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방송이라고 해요. 그래서 저도 대충 방송 내용을 잡고 30분 정도라고 하니까 요점을 간략하게 메모를 해서 대충 애드립으로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학원 담당자가 제게 하는 말이, 처음부터 그러지 말고 아예 꼼꼼하게 원고를 적어보라는 거예요. 어느 정도 꼼꼼하게 적냐 하면 웃음소리까지도 한 번 적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말을 들었을 때, 뭐 꼭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했습니다. 내가 그래도 일본어를 가르친 경험도 좀 되는데, 그렇게 웃음소리까지 적을 정도로 할 필요가 있을까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쪽에서 그런 말씀까지 하고 그랬으니, 어디 한 번 써볼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습관이 안 되니까 잘 안 써지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무슨 수업을 하는데 원고를 읽으면서 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참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참 어려웠습니다만, 그래도 몇 번 해보니까 이게 참 좋더라고요. 무엇보다도 제한된 시간 내에 질질 늘어지는 일 없이 마칠 수 있어서 얼마나 깔끔하게 진행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이 때의 경험이 참 많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경험도 모든 것을 예비해주시는 주님께서 다 미리 훈련을 시키신 것이 아닐까 하기도 합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제가 여전히 말씀을 준비하면서 원고를 꼼꼼하게 쓰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첫번째 이유는, 제가 인터넷으로 촬영을 할 때에 보면 한국어와 일본어로 하게 되는데, 만약 꼼꼼하게 적힌 원고가 없으면 그 내용이 매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구절을 제가 완벽하게 외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대충대충 말씀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두번째는 사실 이 부분이 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원고를 꼼꼼하게 적는 이유는 설교 시간이 길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끔 보면 말을 길게 하는 것이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만, 그게 어디 그런가요?

무슨 행사 같은 데에서 귀빈 인사 같은 것을 들으면 다 그 말이 그 말 같은데도 불구하고 돌아가면서 몇 십 분씩 하는 것을 들으면 참 힘듭니다. 특히나 어렸을 때 생각해보면 뜨거운 여름날 운동회를 하는데 무슨 동네 유지들이 많이 와서 말씀을 많이 하시는지, 그 땡볕에 서 있으면 얘기 내용은 들어오지 않고 빨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보면 학교에서 매주 조회가 있었잖아요. 그러면 그 때 교장선생님이 여러 말씀들을 하시지요. 초, 중, 고, 방학 기간을 빼면 대략 1년에 30번 정도 조회를 한다고 하면, 단순계산으로 30 곱하기 12년이면 몇 번이에요? 예, 360번입니다. 그렇게 많이 교장 선생님 말씀을 들었는데, 기억이 나는 말씀이 있으세요? 글쎄요, 다른 분들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기도도 그렇죠. 무조건 길게 하는 기도가 좋은 기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디 가서 대표기도를 하시는 것을 들어봤습니다만, 그 분은 짧게 잡아서 한 10분에서 15분은 한 것 같아요. 그러면 듣는 사람이 감명을 받나요? 10분 15분이 1시간 2시간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게 만약에 식사 기도였다고 생각해보세요. 밥 다 식어요.

물론 내용에 따라서는 무조건 짧다고 좋은 것은 아니겠지요. 예배시간에 대표기도를 한 두 마디 하고 끝난다거나 주일설교말씀을 5분이나 10분 정도만 하고 끝난다면 은혜가 덜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서 제가 만약에 원고를 준비하지 않고 설교를 한다고 하면,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집니다. 그리고 어쩌면 했던 말도 또 하고 그럴지도 몰라요. 그게 말을 잘 하는 건가요? 말하는 본인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할지는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구절은 어떻습니까.

먼저 중심이 되는 오늘 앞의 두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24.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이 말씀은 제가 볼 때에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야말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짧은 두 구절 안에 복음의 핵심이 모두 담겨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 너무 말이 길어지지 않게, 그러나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3장 23절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3.すべての人は罪を犯して、神の栄光を受けることができず、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 <거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말하지요. 99.999%와 100%는 결과만으로 보았을 때에 그 양은 비슷할지 모릅니다만, 의미상으로 볼 때에는 완전히 다릅니다.


70%든 80%든 90%든, 하물며 99.999%든 간에 이 숫자에는 무엇이 존재하느냐 하면 <예외>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100%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예외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사람>, 즉 100% 예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예외 없이 모든 사람, 100%가 어떻다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이는 쉽게 말해서 의인, 즉 의로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없느냐 하면, 100%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사람, 정직해 보이는 사람,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 100%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자기 힘으로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절망입니다. 전혀 희망이 없어요. 100% 희망이 없어요.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대로라면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확률은? 예, 0%, 그렇다면 무엇이 100%입니까. 그렇습니다.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겪게 될 확률이? 예, 100%라는 끔찍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지옥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가복음 9장 48절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ゲヘナでは、彼らを食らううじ虫が尽きることがなく、火も消えることがありません。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 삼아 여러 곳에 다녀보는 것은 좋을 수가 있겠습니만, 이 지옥만은 절대로 가서는 안됩니다. 근처에도 갔다가는 큰일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대로라면 우리는 꼼짝없이 지옥에 떨어지고 맙니다.

“아니야. 나는 괜찮아. 다른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괜찮을 거야.”

혹시 이렇게 생각되십니까. 그럴까봐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 100%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여기에는 바늘구멍만한 예외도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경은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 구절을 봅니다.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4.神の恵みにより、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を通して、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여기에 나오는 <속량>이 무엇입니까. 사실 교회에 오래 다녀도 이 뜻을 정확하게 아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되냐 하면, 예, 사전을 찾아보면 되겠지요?

국어사전에 보면 <속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몸값을 받고 종의 신분을 풀어 주어 양민이 되게 하는 것”

이는 기독교사전이 아니라 일반 국어사전에 이와 같이 나와 있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자, 그리고 이해를 좀 더 돕기 위해서 24절의 말씀 순서를 좀 더 자연스럽게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와 그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로>를 바꾸면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집니다.

이렇게 바꾸어서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을 보내주신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으로 인한 속량으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속량의 뜻이 뭐였습니까. 그렇죠. 몸 값을 받고 종의 신분을 풀어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는 것, 즉,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종이 되었던 우리를 예수님의 몸 값으로 인해서 자유인이 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절망 뿐이었습니다.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몸이었습니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 벗어날 길을 만들 힘도 없습니다. 자격도 없습니다. 그 절망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 속에서 벗어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빛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럴 힘도 능력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할 몸값으로 하나님은 무엇을 지불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몸값으로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예수님의 생명을 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 귀한 예수님을 내주셨습니까. 이는 마치 100원이나 200원 정도 되는 물건을 사는데 10000원을 내놓는 것과 같은 것인가요? 거스름돈이 많이 남는 그와 같은 거래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안 됩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의 죄는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헌금을 많이 내셨나요? 아니면 봉사를 많이 하셨나요?

여러분, 우리가 만약에 슈퍼에서 어떤 물건을 살 때를 생각해봅니다. 1000원짜리 물건을 살 때 1000원을 지불하지요. 그 이유는 그 물건을 파는 사람은, 그 물건의 가치를 1000원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 물건을 사는 사람은 그 물건의 가치가 1000원이라고 하는 데에 동의를 했기 때문에 지불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죠. 예수님의 가치와 동등한 것을 지불해야지만 되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이 과연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즉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피조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는 예수님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똑같이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지불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기록합니까.

로마서 3장 24절 후반부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価なしに義と認められるからです。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런 값 없이 예수님을 보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거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오라고 하실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오셔야,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우리의 죄가 해결된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말씀 중에서 로마서 3장 25절을 봅니다.

로마서 3장 25절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5.神はこの方を、信仰によって受けるべき、血による宥めのささげ物として公に示されました。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るためです。神は忍耐をもって、これまで犯されてきた罪を見逃してこられたのです。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자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려 주심으로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내어주심으로써, 죄로 인해서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오래 참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타락한 이후에도 끝없이 사람은 반복해서 죄를 지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왔습니다.


이를 가장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었겠습니까. 그렇죠. 그냥 깨끗하게 다 밀어버린 다음에, 다시 새로 창조하시면 되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래 참고, 참고, 참고, 참고, 그리고 또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를 간과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간과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모를 때면 어떻게 해요? 예, 국어사전을 보면 됩니다.

국어사전에는 <간과하다>라는 뜻에 대해서 <큰 관심 없이 대강 보아 넘기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신가요? 없으신가요?

예, 대단히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2장 7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それどころか、あなたがたの髪の毛さえも、すべて数えられています。恐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あなたがたは、多くの雀よりも価値があるのです。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실 정도로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간과하신다는 것, 큰 관심 없이 대강 보아 넘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은 죄를 간과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 하나하나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신다면, 거기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심을 안 가지신대요. 그것은 우리가 죄를 안 지은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무거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이미 예수님께서 대신 받아 주셨어요. 이제 우리가 받을 벌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분명히 죄를 지었지만, 우리가 죄를 안 지은 것으로 쳐준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값을 모두 받은 것으로 쳐준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3장 26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6.すなわち、ご自分が義であり、イエスを信じる者を義と認める方であることを示すため、今この時に、ご自分の義を明らかにされたのです。”

하나님께서는 이로 말미암아 의로우심을 나타낸다고 하십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나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입장권을 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외에 누군가가 말하기를 자기야말로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기이지요. 거짓말입니다.

이 자격,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오로지 의로우신 하나님만 주실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조건이 뭐라고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이 조건 하나뿐인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죄의 노예로 살아야 할 우리,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100% 지옥행이 약속되었던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되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 한 분을 믿기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사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내와 의로움을 모두 믿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간과해 주십니다. 없는 것으로 쳐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간과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신 예수님의 희생에 대해서 감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허락하신 그 날까지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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