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회 버리는 것과 얻는 것
2021년 7월 25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8절~9절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ローマ人への手紙 6章8節~9節
“8.私たちがキリストとともに死んだのなら、キリストとともに生きることにもなる、と私たちは信じています。
9.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キリストは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って、もはや死ぬことはありません。死はもはやキリストを支配しない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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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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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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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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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43번째 시간으로서 “버리는 것과 얻는 것” 捨てるものと得る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7월 4일부터 지금까지 로마서 6장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 로마서 6장 8절~9절 말씀을 보시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무슨 새로운 느낌이 드시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느낌이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했던 말과 별로 차이가 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죽었으면,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살아난다’는 내용은 앞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또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로마서 6장을 보면 1절~14절까지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다는 내용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비슷한 내용을 몇 번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기록한 것일까요.

여러분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7월에서 8월로 넘어가는 요즘 같은 경우를 보면 날도 많이 더워져서, 많이 지쳐있을 때에는 물도 좋지만 가끔 스포츠 음료 같은 것을 마실 때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른바 스포츠 음료가 물보다 몸에 더 흡수가 빨리 된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스포츠 음료라고 하는 것이 참 신기해요. 별로 목이 마르지 않을 때에 마시면 그냥 맛이 밋밋해요. 무슨 싱거운 숭늉이라도 마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몸속의 수분이 부족해서 갈증을 심하게 느낄 때에 이 음료를 마시면 그 맛이 참 달콤하게 느껴지는 경험이 혹시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한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별로 갈급함이 없을 때에는 성경을 읽어도 다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고, 예배 시간 때 목사님 말씀을 들어도 맨날 했던 말 또 하고 그러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은혜가 될 때는 성경 어디를 펴도 참 은혜가 되고 달콤합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 내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게 더 심해지면 자기밖에 모르는 비밀을 목사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의심을 하시고는 예배가 끝난 다음에 직접 따지는 분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목사님이 비밀을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해서 전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직접 해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예전에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를 보면, 주로 저는 시험과목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만, 그 때 독해 문제에 대해서 수업을 할 때 자주 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필자는 바쁘다>라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독해문제라고 하면,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간에 어떤 본문을 읽고 난 다음에, 그 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때 거기에 나오는 본문을 쓰는 필자는 한가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필자는 그 글을 심심풀이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있기 때문에 바쁜 시간을 쪼개서 심혈을 기울여가며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본문에 있는 내용은 모두가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정보라서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만, 바울 선생이 한가해서, 시간이 남아서, 심심풀이로 적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는 모두가, 없는 시간을 쪼개서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한 글자씩 기록한 말씀, 직접적으로는 사람이 썼지만 이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저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비슷한 말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주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본다면 오늘 본문처럼 반복해서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는 것은, 여기에도 크나큰 의미가 있다고 우리는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우리도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렇게 말을 하기는 쉽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에 ‘아멘’하기는 쉽지요.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제가 잠시 미국에 있을 때 영어 필기에 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 때 미국인 선생님이 강조하셨던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항상 글을 구체적으로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었다면 그냥 ‘맛있는 것을 맛있게 먹었다’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먹었고, 그리고 그 음식의 맛은 구체적으로 어떤 맛이었는가’ 하는 내용까지 적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로마서 6장 8절~9절이 적인 오늘 본문 이전에도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부활한다는 말씀은 몇 번이고 있었고, 그리고 이를 공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까지 오니까, 보기에 따라서는 똑 같은 말씀의 반복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말씀에서도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처럼 반복적으로 되풀이해서 기록된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가 있을까요.

요한복음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죽는다는 것을 다른 말씀으로 표현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18절
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わたしが再びいのちを得るために自分のいのちを捨てるからこそ、父はわたしを愛してくださいます。
だれも、わたしからいのちを取りません。わたしが自分からいのちを捨てるのです。わたしには、それを捨てる権威があり、再び得る権威があります。わたしはこの命令を、わたしの父から受けたのです。」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는 것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실수나 예수님이 잘못으로 본의 아니게 잡혀서 죽으시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예수님이 뜻하신 바에 따라 죽으시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한다면, 우리도 역시 무언가를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릴 때를 보면, 채찍에 맞으실 때,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박힐 때의 아픔을 생각하게 됩니다만,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 67절~68절
67.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それから彼らはイエスの顔に唾をかけ、拳で殴った。また、ある者たちはイエスを平手で打って、
「当ててみろ、キリスト。おまえを打ったのはだれだ」と言った。


마태복음 27장 28절~30절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そしてイエスが着ていた物を脱がせて、緋色のマントを着せた。
それから彼らは茨で冠を編んでイエスの頭に置き、右手に葦の棒を持たせた。そしてイエスの前にひざまずき、「ユダヤ人の王様、万歳」と言って、からかった。
またイエスに唾をかけ、葦の棒を取り上げて頭をたたいた。



마가복음 15장 29절~32절
29.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30.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31.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通りすがりの人たちは、頭を振りながらイエスをののしって言った。「おい、神殿を壊して三日で建てる人よ。
十字架から降りて来て、自分を救ってみろ。」
同じように、祭司長たちも律法学者たちと一緒になって、代わる代わるイエスを嘲って言った。「他人は救ったが、自分は救えない。
キリスト、イスラエルの王に、今、十字架から降りてもらおう。それを見たら信じよう。」また、一緒に十字架につけられていた者たちもイエスをののしった。

이와 같은 기록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머리를 흔들며 고함을 지릅니다. 주먹으로 때리고 침까지 뱉습니다. 저도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때로는 여러 가지 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가 나한테 침을 뱉는다거나 하는 모욕까지는 당해보지 못했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통은 이루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대단히 큰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보다 나은 사람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거나 놀림을 당해도 기분이 적지 않게 나빴을 텐데, 예수님이 보실 때 우리 인간들은 어떤 존재였겠습니까.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피조물입니다. 그것도 그냥 피조물입니까. 죄 많은 피조물, 마지막 심판 날에는 꼼짝없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죄인들입니다.

그런 죄인 된 피조물로부터 이와 같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을 당하셨던 주님이 버리셨던 것은 과연 생명 뿐이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버리셨던 또 하나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습니다. 바로 자존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했을 때, 예수님은 그와 같은 수준 이하의 모욕을 물리치실 힘이 없으셨을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거기서 내려오실 능력이 없으셨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대제사장들이 보낸 군대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뽑아 저항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54절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それとも、わたしが父にお願いして、十二軍団よりも多くの御使いを、今すぐわたしの配下に置いていただくことが、できないと思うのですか。
しかし、それでは、こう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書いてある聖書が、どのようにして成就するのでしょう。」

이 내용에 있어서 어느 주석서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하나의 군단 규모는 보병 6,100명에 말이 726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2 군단이라고 하면 보병만 하더라도 6,100명 x 12라고 한다면 무려 73,200명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숫자를 사람 보병이 아니라 천사의 숫자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에 보면 천사 하나만이라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천사 수가 70,000이 넘는다고 하는 숫자는, 이는 순식간에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도 남을 만한 숫자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뭐냐 하면, 알기 쉽게 말해서 내가 지금 마음만 먹으면, 나를 잡으러 온 저 얼마 안 되는 군대를 물리치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을 다 건너 뛰어서 요한계시록에 있는 마지막 날 심판까지도 당장에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까지도 하실 수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구원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 예수님의 자존심을 세우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등을 돌리시고 자신을 잡으러 왔던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 마저도 감수하셨습니다. 그 귀한 생명만이 아니라, 그 거룩한 존엄 마저도 우리를 위해 버리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이 자존심에 대해서 이미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모습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7절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彼らがしている行いはすべて人に見せるためです。彼らは聖句を入れる小箱を大きくしたり、衣の房を長くしたりするのです。
宴会では上座を、会堂では上席を好み、
広場であいさつされること、人々から先生と呼ばれることが好きです。

누가복음 14장 8절~11절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結婚の披露宴に招かれたときには、上座に座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より身分の高い人が招かれて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あなたやその人を招いた人が来て、『この人に席を譲ってください』と言うことになります。そのときあなたは恥をかいて、末席に着くことになります。
招かれたなら、末席に行って座りなさい。そうすると、あなたを招いた人が来て、『友よ、もっと上席にお進みください』と言うでしょう。そのとき、ともに座っている皆の前で、あなたは誉れを得ることになります。
なぜなら、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るからです。」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자존심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존심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높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존심과 명예를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명예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훌륭하다고 인정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자기가 스스로를 높여서 자존심을 세운다면 자신의 명예가 올라갈까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것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강아지나 고양이나 소나 양들을 위해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사람을 위해서, 창세기에 1장 2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형상을 따라 만들어주신 우리 사람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기껏 하시는 말씀이 어디 가서 좋은 자리에 가서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가서 앉으래요. 대우를 받기보다는 대우를 해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한테 창피를 당하라는 말씀인가요? 주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천한 대우를 받는 것을 원하고 계신 건가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생각하기에 자기 자식이 바깥에 가서 따뜻한 밥을 먹고 좋은 대접 받기를 원하지, 자기 자식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찬밥 대우를 받기를 원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더러 낮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높아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1장 4절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彼らは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自分たちのために、町と、頂が天に届く塔を建てて、名をあげよう。われわれが地の全面に散らされるといけないから。」

이 말에 보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야심이 보입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창세기 11장 8절~9절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主が彼らをそこから地の全面に散らされたので、彼らはその町を建てるのをやめた。
それゆえ、その町の名はバベルと呼ばれた。そこで主が全地の話しことばを混乱させ、そこから主が人々を地の全面に散らされたからである。

하나님께서는 그 탑을 짓는 사람들의 말이 서로 통하지 않게 하셔서 결국 그 야심을 단번에 꺾어 버리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리가 자존심을 세운다고 높아질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가만히 두고 보고 계실 것 같으십니까.

오바댜 1장 4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오바댜 1장 4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オバデヤ書 1章4節
鷲のように高く上っても、星々の間に巣を作っても、わたしは、おまえをそこから引きずり降ろす。──主のことば。


교만과 오만과 자만이라는 이름으로 자존심을 세우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웃을 무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높이까지 올라갔다 하더라도, 하물며 별들 사이에 자리잡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우리를 끌어내리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자존심을 세우지 않으면, 남들이 나를 무시하고 내 명예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자존심과 명예가 무엇일까요. 자존심과 명예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존심이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는 것이고, 명예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높여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3일에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만, 거기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훈련했다. 이 날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이런 말들을 고래고래 큰 소리로 떠든다고 누가 금메달을 줍니까? 아니에요 안 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메달을 딸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경기에서 그 노력한 성과를 보여줌으로 인해서 그것을 판단하는 심사위원들이 좋은 평가를 해주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자기 스스로가 잘했다고 하더라도 심사위원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메달을 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노력만으로 메달을 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자기가 종이에 금메달을 그려서 자기 목에 걸고는, 이제 자기도 금메달리스트라고 자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미워서 우리더러 자존심을 세우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욱 좋은 것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だれでも、自分を高くする者は低くされ、自分を低くする者は高くされます。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잠언 4장 8절~9절
8.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9.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それを尊べ。それはあなたを高める。それを抱きしめると、それはあなたに誉れを与える。
それは頭に麗しい花の冠を与え、輝かしい冠をあなたに授ける。」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만이 아니라 자존심마저도 버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자존심을 세우게 되면 다툼이 생깁니다. 미움이 생깁니다. 탐욕이 생깁니다. 염려가 생기고, 불의가 생기고 교만이 생기고 분쟁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얄팍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여 주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주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 우리를 낮추고 겸손하게 섬길 때,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영화로운 면류관을 모두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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