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회 저주 받은 고난과 축복 받은 고난
2021년 12월 26일 설교

홍성필 목사
www.kirin.kr
kirinmission@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18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ローマ人への手紙 8章17節~18節
“17.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のですから、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ともに共同相続人なのです。
18.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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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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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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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5번째 시간으로서 “저주 받은 고난과 축복 받은 고난” 呪われた苦難と祝福された苦難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오늘 두 구절은 우선 각각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7절 전반부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 전반부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はじめと最後
17.子どもであるなら、相続人でもあります。……神の相続人であり、キリストとともに共同相続人なのです。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어떻습니까. 17절의 앞부분은 이해가 됩니다. 자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부모와 자식이라는 그 관계만이 아니라 부모의 유산을 이어받을 자격, 말하자면 상속권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소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예습하는 의미에서 로마서 8장 29절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神は、あらかじめ知っている人たちを、御子のかたちと同じ姿にあらかじめ定められたのです。それは、多くの兄弟たちの中で御子が長子となるためです。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즉 예수님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로 삼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즉,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 맏아들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기록하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또 소박한 의문이 생깁니다. 아하,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는 것인가?

이 질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예수님은 조물주이십니까. 피조물이십니까.

요한복음에 보시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이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태초란 언제를 말하는 것이냐 하면 이는 작은 의미의 태초와 큰 의미의 태초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의미의 태초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바로 이 시점이 작은 의미에서 태초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서 살펴본 요한복음의 기록과 같이 예수님 없이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이 천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큰 의미에서의 태초라고 하는 것은 언제일까요. 이는 이 세상, 지구만이 아니라 우주도 창조되기 훨씬 이전부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되셨을 때라고 해야 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큰 의미에서의 태초라고 하겠습니다.

그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태초라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일까요.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몇 년째 하고 계신 것일까요.

이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진 우리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부터 하나님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가진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90편 2절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山々が生まれる前から 地と世界を あなたが生み出す前から とこしえからとこしえまで あなたは神です。

이는 몇 백 만년, 몇 천 만년이라고 하는 단위가 아닌,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요, 예수님도 하나님이시요,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님도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또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조물주와 피조물은 넘을래야 넘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누구입니까. 피조물 그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의미는, 우리의 행위, 말하자면 율법적인 행위로서는 우리의 죄를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왜 율법적인 행위로는 용서 받을 수가 없습니까. 율법이 불완전해서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율법이 불완전하다고 한다면, 이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율법적인 행위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율법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부족한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천국에는 죄인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는 엄밀히 따지자면 이 세상에서는 단 한 사람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예수 이름을 믿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들은 값없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마트에 가서 1만원짜리라고 적힌 물건을 1만원을 내고 샀어요. 이것은 은혜인가요?

아, 물론 여러분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신 분들께서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은혜라고 여기시겠습니다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은혜는 아니지요. 마트에서 1만원이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1만원을 내고 샀다면 이는 은혜가 아니라 그냥 거래일 뿐이지요.

하지만 내가 빈털터리에요. 1만원은 고사하고 주머니에 10원짜리 동전 몇 개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빵 하나, 우유 한 개도 못삽니다. 바깥은 요즘처럼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거기다가 배가 고프니까 너무나도 추워요.

그런데 마침 눈앞에 크고 멋진 백화점이 있어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안에 들어가서, 백화점 직원 옷을 입은 어떤 점잖은 사람한테 가서 말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10원짜리 몇 개밖에 안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로는 이런 멋진 백화점에서 빵 한 봉지, 과자 한 조각도 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나도 춥고 배가 고픕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라도 상관 없으니 남는 빵이라도 하나 주시고, 여기 난방이 따뜻한 곳에서 몇 분만 쉬었다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점잖은 직원이 말합니다.

이보시오. 나는 이 백화점 사장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이 백화점 안에 있는 것을 마음대로 드세요. 그리고 저기 가면 샤워장이 있습니다. 거기서 샤워를 하신 다음에, 이 백화점에 있는 옷 중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속옷부터 겉옷까지 마음대로 입으세요. 그리고 양말이나 신발도 편한 것으로 골라서 신으세요.

이제부터 언제라도 배가 고프거나 춥거나 입을 옷이 필요하면 이곳으로 오세요. 마음대로 드시고 마음대로 입어도 됩니다.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돈이 있습니다. 이 돈으로 방을 얻으세요. 아, 그리고 우리 백화점에서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당장 내일부터 출근해도 좋습니다.

이게 지금 이 배고픈 사람에게 감당할 일입니까? 아니에요. 이 사람은 이와 같은 놀라운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하나도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어쩌면 이 사람은 여러가지 조건으로 미루어보아 이러한 멋진 백화점에 원서조차 내지 못할 상황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뭐예요? 예, 사장님이 마음대로 입으라고 하고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장님께서 자기가 뽑아주겠다고 하는데 누가 반대할 사람이 있겠어요.

이처럼 차마 감당하지 못하는 대접,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처럼 죄인이 무엇을 했다고 구원을 받습니까. 일거수일투족이 모두가 죄에서 시작해서 죄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죄인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고 구원을 얻어, 그야말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아니라면 받지 못할 축복과 사랑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아 주셔서,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은혜, 넘치는 은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여기까지가 17절 전반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7절 후반부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 후반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中盤
私たちはキリストと、栄光をともに受けるために苦難をともにしているのですから、

이제 큰일났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을 받기 위해서 우리도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어떤 것입니까. 온몸이 채찍에 의해 찢기고, 머리에는 가시로 된 관을 써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그 상태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십니다.

건강한 사람이 빈손으로 오르는 것도 아닌, 얼굴은 머리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눈코입도 구분이 잘 안 됩니다. 눈은 침침해서 앞도 잘 안 보이고, 무겁고 까칠까칠한 십자가 나무는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 언덕길에서 예수님은 여러 번 넘어지셨습니다.

이윽고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높은 곳에 세워졌습니다. 숨을 한 번 쉬기 위해서는 손과 발을 의지해서 상체를 올려야 하는데, 그 때마다 못이 박힌 손과 발에 상상도 할 수 없는 통증이 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상체를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나무 십자가의 가시가 예수님 등허리를 찌르고 할퀴었을 것입니다.

이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 하는 것을 상상만으로 알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그 전날 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도를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까.


누가복음 22장 42절~44절
“42.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父よ、みこころ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去っ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
〔すると、御使いが天から現れて、イエスを力づけた。
イエスは苦しみもだえて、いよいよ切に祈られた。汗が血のしずくのように地に落ちた。〕

이 장면에 대한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 보면, 땀이 붉은 핏방울이 되어서 떨어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얼굴을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워낙 한 번에 땀을 많이 흘리시다 보니, 마치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핏방울 같이 뚝뚝 하고 땀이 떨어졌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절박한 심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 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뭐예요.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고난을 우리도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이는 ‘대속’이라는 말씀에 문제가 생깁니다. ‘대속’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신해서 죄값을 치른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져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아무런 값없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모순이 있는 것인가요?

이럴 경우에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대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적힌 책으로서, 전혀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아니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정답은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것도 철저한 죄인으로서, 전무후무한 끔찍한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キリストは、ご自分が私たちのためにのろわれた者となることで、私たちを律法ののろいから贖い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木にかけられた者はみな、のろわ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

베드로전서 2장 24절 전반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キリストは自ら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をその身に負われた。それは、私たちが罪を離れ、義のために生きるため。その打ち傷のゆえに、あなたがたは癒やされた。


예수님께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를 다 짊어지셨으니 이처럼 끔찍한 죄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으로 십자가라고 하는 나무에 달리시면서, 철저하게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그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해결해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제가 예전에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하면, 뭐 물론 재미있었을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좀 안 좋은 기억도 있지 않겠어요?

여러분께서는 학교 다니실 때 뭐가 가장 싫으셨습니까. 아마도 두 가지를 꼽으라면 하나는 시험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을 좋아했던 분들은 별로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는 입학시험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생각해보세요. 입학시험은 어때요?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은 쉽게 말하자면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입니다. 모집정원보다 많은 수험생이 모였어요. 그러면 그 모집정원 이상 되는 수험생들을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 그게 바로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입니다.

반면에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을 망쳤다고 학교에서 당장 내보내요? 아니요. 아무리 엄격한 학교라 하더라도 그러지는 않습니다.

물론 점수는 잘 못 받겠죠. 그래도 공부가 시원치 않으면 선생님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불러내서, 너 요즘 무슨 고민 있니. 집안에 무슨 문제라도 있니. 재시험을 볼 수 있게 해줄게, ……뭐 이러면서 어떻게 해서든 올바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선생님들이 애를 쓰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세요. 우리의 모습,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보시고 예수님이 보신다면, 만족해 하실까요? 물론 그런 훌륭한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것은 이렇게 해라, 저것은 저렇게 해라……라는 규정을 많이 만들어 놓으셨을까요.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주셔서 그들이 먹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그냥 주시면 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 이제 여러가지 방법을 붙이세요.

아침 일찍 들에 나가서 거둬라, 거둘 때에는 그날 먹을 것만 거두고 다음날까지 보관하지 말아라, 여섯째 날에는 평소 먹을 양보다 두 배를 거두고 다음날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리지 않을 테니, 들에 나가지 말아라……뭐 이런 명령들을 많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셨을까요. 만나 좀 주시면서 생색 내시려고 하셨던 것일까요?

출애굽기 16장 4절 후반부에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 후반부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これは、彼らがわたしのおしえに従って歩むかどうかを試みるためである。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들을 많이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를 시험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앞서 말씀드렸던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을 왜 학교에서 치릅니까. 그것은 수업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험은, 학생을 내쫓으려고 보는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시험을 쳐야 내신성적을 올릴 수가 있잖아요. 점수를 줄 수가 있잖아요. 시험을 안 보면 점수를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이유는 그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만 하면 축복을 넘치도록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면서 싫었던 것 두 번째는요, 이는 초등학교 때에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만, 바로 체벌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지금은 뭐 그러면 큰일난다고 하는데, 특히 일본은 그래도 체벌이 대체적으로 보면 비교적 빨리 없어지지 않았나 하는데, 한국에는 꽤 최근까지 공공연하게 있었지요?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한국은 2011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초중고를 일본에서 다녔습니다만, 초등학교는 신쥬쿠에 있는 동경한국학교 초등부를 나왔는데, 당시에는 한국학교라서 이것도 한국식이라 체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뭐 폭력이 아니라, 제가 기억하는 한 선생님은 대걸레 손잡이를 이만큼 잘라서 항상 그 선생님을 들고 다녔어요. 그리고 무슨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하면, 남학생은 그걸로 엉덩이를 때리고, 여학생은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도 몇 번 엉덩이를 맞은 적이 있는데, 그 날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뭐 한 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잘못한 것이 있어서, 제 기억에는 적어도 4~5명 정도의 남학생이 앞에 나와서 차례대로 교탁 앞에 딱 엉덩이를 내밀고 한 세 대씩 맞았던 것 같아요.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마 겨울철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지금도 동경에 있는 초등학교는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다닐 거예요. 그런데 추운 겨울 날에 반바지를 입었다 하더라도 그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으면, 무척 아프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때리시는 선생님도 고수라서 아프기는 무척 아픈데, 멍도 안 들고 붓지도 않아요. 아예 흔적도 안 남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제 차례가 되어서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데, 세 대를 맞는게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 대 맞으면, 엉덩이를 비비면서 아이구 아파요……하고 하면 선생님이 빨리 대라고 호통을 치시죠. 그러면 또 쩔쩔 매면서 한 대를 맞아요. 그러면 또 저는 아이구 아파요 선생님……하면, 이 녀석이 가만히 좀 있으라고 또 큰 소리를 내십니다.

그러면 뭐 저는 아파 죽겠다는데 보는 애들은 어땠겠습니까. 자기들은 그런 모습들이 막 재미있다면서 깔깔 거리고 난리죠.

그렇게 해서 간신히 세 대를 맞았어요. 아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바로 뒤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그 아픔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요. 제 다음으로 엉덩이를 맞으러 나온 그 녀석은, 당당하게 교탁 앞에 떡 엉덩이를 내밀고 서더니만, 선생님이 세 대를 때리시는데 끝까지 꿈쩍도 안하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습을 보고 애들이 오히려 박수를 치고 멋있다고 난리에요. 아, 그걸 보는 제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정말 그 때를 생각하면요. 아픈 것은 둘째치고 아, 정말 저 자신이 얼마나 창피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체벌에 찬성이다 반대다 하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환난을 당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내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미워해서요? 우리를 저주하기 위해서요?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저주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어긴 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를, 우리를 대신해서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한 형벌을 단 하나,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철저한 죄인의 모습으로 채찍을 맞으셨고, 철저한 저주 받은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라는 이름의 나무에 달려서, 우리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처럼 저주받는 고난, 죽음으로 향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어떻습니까. 이는 저주가 아닌 축복 받는 고난, 하나님께 점수를 따는 고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고난을 견디지 못할까 봐, 이것만 잘 넘기면 큰 축복을 주실 텐데 못 넘기면 어떻게 할까 하고 얼마나 노심초사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신다 기록합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하나님은 미쁘사……이 미쁘다는 것이 무슨 뜻이었지요? 이는 참되다, 진실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잘 알고 계세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아예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피할 길까지 다 예비해 주셔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에요? 이는 바로 그 시험을 우리가 통과함으로 인해서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잠언 3장 11절~12절
“11.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わが子よ、主の懲らしめを拒むな。その叱責を嫌うな。
父がいとしい子を叱るように、主は愛する者を叱る。


가끔 뉴스를 보면 자기 아이를 심하게 구타한 부모가 경찰에 잡혀가고는 하는 말이, 가정교육을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세상 부모들이 아이를 교육시키는 데에 모두가 잘했다고 만은 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 참되고 진실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계하실 때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이 또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훈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제가 꾸며낸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 중 18절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8.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저주받는 고난, 죽음에 이르는 고난은, 예수님이 이미 2천년 전에, 누구를 대신해서요? 그렇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다 받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이라고 한다면 이는 무엇을 위한 고난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축복을 위한 고난, 영광에 이르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씀을 드리지만 정말로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는 말로 못할 정도로 힘드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릴 기회가 아니겠습까.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은, 지금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라 하더라도 이후에 받을 영광과 비교해본다면 너무나도 작은 고난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면, 우리 한 번 믿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실 때에, 똑 같은 징계를 받더라도 누구는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누구는 박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로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고 계십니다. 2021년이 끝나가는 지금 이 시점에도 또다시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확진자 수가 세계적으로 늘어가면서 내년에는 또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코로나가 아니라, 이보다도 더 큰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시고, 피할 길도 예비해주시는 주님,


그리고 이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믿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축복과 영광을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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