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9회 [요한계시록 제42회] 심판의 문을 여시는 어린 양 - 이루리라교회 홍성필 목사
 

홍성필 목사
이루리라교회
www.이루리라.com
mail@IRURIRA.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절~8절
“1.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5.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7.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설교 동영상


설교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b0LrSnr4F1M&list=PLi8oNAZU9c8i5yu5YUqsulNOwrFZFc9Ud

설교 음성 : http://file.ssenhosting.com/data1/hongja/539.mp3

설교 본문 : http://www.irurira.kr/irurirapreaching/preaching_pastor_hong_sung_pil_05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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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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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요한계시록 순수강해 42번째 시간으로서 “심판의 문을 여시는 어린 양”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에는 인봉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는데, 이를 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우리 주 예수님 뿐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5장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두루마리에는 인봉이 총 일곱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살펴볼 요한계시록 6장부터는 드디어 예수님께서 인봉을 하나씩 떼어 가시게 되지요.

오늘은 드디어 심판의 막이 오르는 시점에서, 5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과 함께 이제부터 시작되는 심판에 관한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계획, 마지막 심판의 문이 서서히 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선 일곱 인 중에서 1절에서는 첫째 인을, 3절에서는 둘째 인, 5절에서 셋째 인, 그리고 7절에서는 넷째 인을 떼시게 됩니다.

이 넷째 인까지는 각 인을 떼실 때마다 네 생물 중 하나가 차례대로 말을 한다고 해요.

여기에 등장하는 네 생물이란 계시록 4장에 등장하는 사자나 송아지, 사람, 그리고 날아가는 독수리 같이 생긴 생물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6장 1절과 2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일곱 인 중 하나를 떼시자 그 네 생물 중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그러니까 말하자면 큰 소리로 “오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흰 말이 나오는데 거기에 활을 가진 자가 탔다고 해요.

그런데 그가 면류관을 받고서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 했다고 기록합니다.

3절과 4절에 의하면 둘째 생물이 ‘오라’ 하고 말을 하자 이번에는 붉은 말이 나오더니 화평을 제하여 버리고 서로 죽이게 하면서 또 큰 칼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5절과 6절에 의하면 검은 말이 나오는데 거기에 탄 자가 저울을 가졌다고 해요.

그러면서 그가 말하기를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과 8절에 의하면 이번에는 청황색, 다른 번역본에 의하면 푸르스름한 색깔의 말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뒤를 음부가 따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검과 흉년과 땅의 짐승들을 써서 땅 사분의 일을 죽였다고 기록해요.

자, 일단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이에요.

제가 가지고 있는 주석서나 또는 일반적인 계시록 설교를 본다면, 예컨대 2절에 등장하는 흰 말은 무슨 뜻이고, 활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면류관을 받아서 이긴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해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4절 이후도 마찬가지죠.

붉은 말은 무엇이고 검은 말은 무엇이다. 저울은 무엇을 상징하고 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을 의미한다면서 이에 대해 단언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자들 사이에 있어서는 이에 대한 견해가 모두 일치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지요.

한 예로 1절과 2절에 등장하는 흰 말과 거기에 탄 활을 가진 자에 대해서 볼까요?

제가 가진 주석서에 의하면 우선 말의 색깔인 흰색은 ‘승리와 정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땅에 심판을 위한 재앙을 내리려는 의도를 암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흰색이 승리와 정복을 나타낸다고 하는 성경적 근거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뒤에 나오는 것처럼 이 땅에 심판을 위한 재앙을 내리려는 의도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단순한 짐작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흰 말에 탄 자, 면류관을 받고 활을 가진 자라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 누구는 로마 제국이나 로마 정복자라고 하고, 누구는 메시야라고 하고, 또 누구는 복음과 그리스도라고 하고, 또 누구는 반대로 적그리스도와 악의 세력을 의미한다고 하고, 다섯 번째는 장차 나타나게 될 어떤 정복자를 의미한다고 해요.

한편으로 다른 주석서에 보니까 또 흥미로운 해석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흰말에 탄 자가 활을 가졌으나 화살을 가졌다는 말은 없다는 점을 들어서 과거 미국과 구 소련 사이에 있었던 냉전시대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참 여기까지 오면 상당히 노력들을 많이 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긍정적으로 본다면요.

자, 이와 같은 지식, 이 구절에 대해서 누구는 어떤 해석을 하고 누구는 어떤 해석을 한다는 그와 같은 지식은, 말하자면 신학생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좋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민법상 사람을 어디서부터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진통설이다 일부노출설이다 전신노출설이다 하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마치 그런 식이지요.

어떤 학설은 그 내용이 어떻고 누가 주장을 한다는 식의 지식은 시험 보기 위해 딱 좋은 지식 아니겠습니까.

세상적인 학문은 절대적인 정답이 없을 수 있겠지요.

하나의 문제를 놓고도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에 맞는 해석이 말하자면 그 시대에 있어서 정답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아닙니다. 무조건 많은 사람이 동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여러 해석 가운데에는 성경의 다른 본문과 연결하여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요한계시록 6장 1절과 2절 자체만 놓고 본다면, 흰 말에 탄 자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성경이 직접 밝혀주고 있지는 않아요.

학문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학설의 차이를 비교하고 분석하는 것이 중요할 지 모르지만, 성경을 구원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하는 점은 대단히 의문스러울 따름인 것이지요.

이는 마치 그런 식이에요.

요한복음 8장에 보시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고 하면서, 율법에 의하면 이 사람을 돌로 치라고 되어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냐고 따집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도 계속해서 따지고 물으니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시고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하나둘 모두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 말씀, 정말 우리 모두가 새겨야 할 말씀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3장 10절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말로 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경찰에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까지 죄를 단 한 번도 짓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의 법은 적발되지 않으면 죄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 앞에서는 다릅니다.

사람의 눈을 피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은 죄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렇게 성경말씀을 받아야 하는데, 신학자들은 여기서 어디에 주목을 하냐 하면 도대체 예수님은 땅에 무엇을 쓰셨냐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누구는 십계명을 썼다, 누구는 거기 모인 사람들의 죄들을 쓰신 것이다, 또 누구는 주기도문을 쓰셨다는 등의 주장들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예수님께서 당시 무엇을 쓰셨는지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자꾸만 주목을 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태양을 보지 않고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격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6장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말들의 색깔을 우리가 어떤 상징으로 해석하느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 양께서 인을 떼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인 것이지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만, 반대로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 역시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말씀드리는 것처럼 성경을 읽었을 때 즉시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억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잣대에 끼워 맞추려고 하면, 이는 성경을 곡해하게 될 위험성이 적지 않습니다.

더구나 계시록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래 일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또 어떻습니까.

나중에 공부하게 되겠습니다만, 계시록 20장에서는 이른바 천년왕국이 등장합니다.

이 천년왕국이 구체적으로 언제 임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신학자들의 견해가 나누어져요.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혹시 그런 말들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무천년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전천년설, 후천년설이라고 하는 이름, 이는 외국어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번역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가끔 신학생들도 헷갈려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이 전천년설이고, 천년왕국이 다 끝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주장이 후천년설입니다.

여기에도 세부적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만, 아니, 그것보다도 이름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이건 무슨 사람 헷갈리게 만들려고 작정하고 붙인 이름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을 수 있겠어요.

자, 그러니까 좀 알기 쉽게 정리하자면, 전천년설이라고 하는 것은 천년전재림설이고, 후천년설은 천년후재림설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더 하나 추가하자면 무천년설도 있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을 문자적인 지상 왕국의 기간으로 이해하지 않고,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이어지는 교회시대와 관련하여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견해예요.

가끔 보면 이런 문제를 가지고 다른 교회에 다니는 성도님들끼리 논쟁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보면 참 안타까워요.

이에 대해서는 차차 계시록을 함께 공부해 나아가면서 살펴보게 되겠습니다만, 미리 한 가지 말씀드릴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컨대 천년왕국을 전천년으로 이해하느냐 후천년으로 이해하느냐 무천년으로 이해하느냐,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은 천년왕국 이전이냐 이후냐 하는 그 해석의 차이 자체가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는 조건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전천년설 다른 말로, 천년전재림설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을 기준으로 해서 이단이다 사이비다 하는 차이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성경우선주의가 있는 반면에 신학우선주의가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성경을 중심으로 신학을 정립해 나아가야 하는데, 사람이 만든 신학에 억지로 성경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면 어떻게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주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성경우선주의, 성경절대주의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명확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추측과 짐작과 추정과 상상으로 이것은 이것을 의미하고 저것을 저것을 상징한다고 단정하게 된다면 이는 그야말로 무슨 외국 신화나 소설이라도 읽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그와 같은 내용을 암기했다고 하면 마치 무슨 지식을 얻은 것 같아 뿌듯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알고 보면 알맹이가 없는 허무하고 공허한 지식의 나열에 그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말씀을 받는 자세로서는 무엇보다 이와 같은 일들이 요한이 바라보는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대로 우선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계시록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의 인봉이 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인봉을 떼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은 흰 말이 무엇을 상징하느냐, 붉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보아야 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인을 떼고 계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계획 가운데 역사는 마지막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시록을 대하는 자세도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상상으로 함부로 채우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곳에서는 분명해야 하고,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곳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우리의 자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부터 일곱 인이 차례대로 떼어지고, 이어서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에 대한 말씀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사람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며, 우리의 짐작보다 성경을 붙들고, 무엇보다 그 모든 말씀의 중심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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