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마음 ♬
2008년 05월 11일 글들

홍성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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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성가대를 섬길 당시 주보에 실었던 글들입니다

에베소서 4장 1절~3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선교후원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가정의 달인 5월을 맞이하여 오늘은 이른바 돌아온 탕자에 대한 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유명한 돌아온 탕자에 관한 말씀은 4복음서 중에서도 유난히 비유로 가득 찬 누가복음에 등장하며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에 이어 15장 11절 ~ 32절에 나옵니다.
그 동안 둘째 아들의 행실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요구합니다(눅 15:12). 분깃은 곧 유산이며 이는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물려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와 같은 관습을 깨고 미리 앞당겨서 유산을 내놓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내게 아버지는 계시든 안 계시든 필요 없으니 어차피 내가 받을 유산이나 빨리 달라”고 하는 주장과 다름 없는 매우 큰 불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는 어떠한 불만도 하지 않고 그저 나누어 주었더니 이를 다 모아서 먼 나라로 떠난 후 재산을 낭비하기 시작합니다. 본 말씀 후반부를 보면 추측할 수 있듯이 그 가정은 매우 부유하였으나 만약 아들들 특히 둘째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서 이루어 낸 풍요로움이었는지를 알았다면 이렇게 허랑방탕한 생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냄새는 돈 냄새이다.” 고약한 냄새를 맡고 다가오는 것들 중에 좋은 것은 없겠지요. 그 돈 냄새를 맡고는 모르고 지냈던 사람들도 아는 척 하고, 조금 지나자 매우 친한 척을 하며 다가왔을 것입니다. 물론 목적은 단 하나.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이었겠지요. 지금도 복권당첨 같은 생각지도 않은 큰 돈이 들어오면 여기저기서 그 돈을 노리고 몰려온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말은 일본이나 미국 같은 외국에서도 역시 똑같다고 합니다. 그것 만이 아니지요. 그 돈이 떨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썰물 빠지듯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까지도 같다고 합니다.
둘째 아들이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어디로 떠났는지를 보면, 성경은 13절에서 ‘먼 나라’로 갔다고 기록합니다. 처음에는 돈이 많으므로 이른바 VIP 대우를 받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인정해주고 최고급으로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산이 떨어지고 돈을 쓸 줄은 알았으나 벌 줄은 몰랐던 둘째 아들은 곧바로 홀대를 받게 됩니다. 모든 부귀와 좌절을 경험한 ‘먼 나라’는 과연 어디였을까.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키게 하였는데, 그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눅 15:15~16)
여기서 잠시 레위기를 살펴봅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레 11:7)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적으로 돼지를 부정하게 여겼으므로 기르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돼지한테 들어가게 하여 2천 마리나 되는 돼지가 몰사하였다는 기록(막 5:1~15 등)을 보면 그 장소가 ‘거라사인의 지방’이라고 하는데 그 곳은 갈릴리 호수 남단에서 동남쪽으로 약 5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방인의 땅이라고 하여 이방 신들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돼지를 길렀다고 합니다. 분명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라고는 하나 예수님께서도 지나셨을 정도로 어떻게 보면 지리적으로는 이방인들의 사는 곳이 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둘째 아들이 떠난 곳을 ‘먼 나라’라고 기록합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이스라엘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예수님의 상징이라고 할 때 ‘먼 나라’란 지리적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처절한 절망 끝에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용서를 빌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18~19)
이 글을 자세히 보면 둘째 아들은 죄를 뉘우쳤기 때문에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기 위해 아버지에게 돌아가야겠는데, 아버지로 하여금 자신을 받아주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빌어야 할 것 같았기에 “나를 품꾼으로라도 받아주세요” 라는 말을 생각해낸 것처럼도 보입니다. 왜 그 지경에 이르도록 돌아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저는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고고하게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큰 소리치며 집을 나왔을 때 그는 보란 듯이 잘 살아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체면상 도저히 돌아갈 수 없었으나 이제 와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겠지요.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자존심이 사라졌을 때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결심을 합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10대 때 철없는 소녀가 어머니와 큰 싸움을 벌이고 집을 나와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곳에서, 더구나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어느 깊은 밤, 어두운 거리에서의 생활에 몸도 마음도 망가진 채로 몇 년 전 박차고 나갔던 집이라도 멀리서 보고 오려고 위안을 받기 위해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미 자정이 넘었는데도 집안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대문도 열려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식탁에는 얼마 전에 차려놓은 따뜻한 밥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인기척을 듣고 잠에서 깨어 나온 어머니와 딸은 재회를 하게 되는데, 언제라도 딸이 돌아올 수 있도록 불을 환하게 켜 놓고 밤에 대문도 열어놓았으며, 들어와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몇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밥을 차려 놓았었다고 합니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들의 아버지는 어느 날 밖으로 나왔더니 우연히 아들을 알아본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겠지요. 어쩌면 아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 다른 가족들이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볼까봐 조심스럽게 두려운 마음으로 걸어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먼저 알아본 것은 학수고대하던 아버지였으며, 아들이 미처 다가오기도 전에 아버지가 먼저 아들에게 달려가 맞이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22~24)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제일 좋은 옷과 신발, 음식, 그리고 아들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락지도 모두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빼놓으면 안 될 사람이 바로 ‘맏아들’입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5~30)
잘난 척은 있는 대로 하고 교만하게 집을 나갔다가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꾸짖기는커녕 잔치를 벌이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맏아들은 불만이 가득 찼습니다. 자신은 힘든 밭일을 하고 돌아왔는데 한 번도 반갑게 맞아주지는 않고 오히려 못난 동생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럴 만도 하겠지요. 본 기록을 살펴보면 맏아들은 매우 성실하고 아버지를 위해 노력한 모범적인 아들이었으며 둘 째는 매우 불성실하고 못난 동생이라는 짐작이 갑니다. 생각건대 둘째 아들은 99% 올바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으며, 이에 반해 맏아들은 99% 성실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맏아들에게 부족했던 1%는 무엇이었을까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동생이 집을 뛰쳐나간 후 형으로서 맏아들은 어쩌면 그 동안 말썽을 부렸던 동생이 사라졌기에 속이 시원했는지도 모르지만, 이에 반해 아버지는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그 동안 슬퍼하며 불안해하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라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아무리 그가 대를 이을 성실한 맏아들이라고는 하나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을 아버지가 어떻게 그와 그의 벗들을 불러 잔치를 벌일 수가 있었을까요. 맏아들은 집을 나간다고 난리를 치는 동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꾸짖지도 않았으며, 집을 나간 후에는 그를 찾아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가 생각했던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이 그런 부유한 집에 태어난 것은 그가 성실해서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주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섬기며 주님 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장 8~9)
맏아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아버지와 동생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돌아온 동생과 그를 환영하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갖지는 않았겠지요.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어 사람들은 이를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우리 부모님이나 형제들만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이웃으로 삼아 주셨다면 교회 성도는 물론 학교나 직장 이웃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맺어주신 가족입니다. 이와 같은 가족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의 중요함을 깨닫고 이를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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