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회 우리가 가져야 할 것
2020년 8월 16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신약 47페이지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マタイの福音書 26章 52節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つるぎ)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つるぎ)を取る者はみな剣(つるぎ)で滅びます。”

한국어 동영상
https://youtu.be/xTLDiNLruh4

일본어 동영상
https://youtu.be/McnBLVGxgcw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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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가져야 할 것” 私たちが取るべきもの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장면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8절~52절
48.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者は彼らと合図を決め、「私が口づけをするのが、その人だ。その人を捕まえるのだ」と言っておいた。
それで彼はすぐにイエスに近づき、「先生、こんばんは」と言って口づけした。
イエスは彼に「友よ、あなたが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しなさい」と言われた。そのとき人々は近寄り、イエスに手をかけて捕らえた。
すると、イエスと一緒にいた者たちの一人が、見よ、手を伸ばして剣を抜き、大祭司のしもべに切りかかり、その耳を切り落とした。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を取る者はみな剣で滅びます。

이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 외에 주된 등장인물이 세 명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첫째는 48절에서 <예수를 파는 자(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者)>, 둘째와 셋째는 51절에서는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イエスと一緒にいた者たちの一人)>와 <대제사장의 종(大祭司のしもべ)>, 이렇게 세 명입니다.

여기서 첫째, <예수를 파는 자(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者)>는 의심의 여지 없이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호시탐탐 노렸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없는 밤에 잡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를 가야지만 예수님이 계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은 예수님이 계시는 정확한 장소를 알고 있는 가룟 유다와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갔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8장 2절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一方、イエスを裏切ろうとしていたユダもその場所を知っていた。イエスが弟子たちと、たびたびそこに集まっておられたからである。

마태복음 26장 30절에 의하면 그 곳은 감람 산(オリーブ山)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이 계신 감람산으로 향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 하나가 칼을 빼 들고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이 인물에 대해서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언급이 없습니다만, 요한복음에 보면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0절을 봅니다.

요한복음 18장 10절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シモン・ペテロは剣を持っていたので、それを抜いて、大祭司のしもべに切りかかり、右の耳を切り落とした。そのしもべの名はマルコスであった。

이제 이 세 사람 이름이 모두 밝혀졌습니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을 이끌고 감람산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베드로가 칼을 뽑아 들고서 공격을 하자,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 중에서 말고라고 하는 사람의 귀를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칼은 지금 우리가 익히 아는 것과 비교해보면 정말로 무겁고, 제대로 쓰기가 힘들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더구나 이 때는 깊은 밤이었습니다. 주변은 어두웠을 것이고, 주위를 밝히고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군인들이 들고 왔을 횃불이 다였을 것입니다. 그런 어두침침한 상황에서 베드로가 칼을 뽑아 들고는 상대방의 귀를 떨어뜨렸다고 한다면, 이는 정말 놀라운 칼 솜씨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어부출신입니다. 고기잡이를 하게 되면 힘은 남들보다 강했을지는 모르지만, 칼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 힘만 가지고 되나요. 이를 제대로 써서 전투를 하려고 한다면 전문적인 훈련을 통한 기술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그와 같은 능력이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귀를 떨어뜨릴 수 있었느냐 하면, 이는 의도적으로 귀를 공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군대에 보면 <오발은 명중이다>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총이나 화살을 써서 과녁 정중앙에 맞추기를 상당히 힘들지만, 본의 아니게 사고로 이를 쏘게 될 경우에는 분명히 무엇인가에 맞아서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기를 다룰 때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뜻의 경고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38절에 의하면 당시 그들은 두 자루의 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검을 제대로 쓸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굳이 꼽는다면 사도들 중에서 이른바 셀롯, 그러니까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를 무력으로 몰아내고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열심당원 출신인 시몬 정도가 어쩌면 그나마 검을 다룰 수 있었지 않을까 하고, 그 외에는 다들 무기를 다루는 일에 능숙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당시 가지고 있던 검은 뭐냐 하면, 그저 단순한 호신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변은 어두컴컴한데 갑자기 무장을 한 여러 군인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밤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있었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예수님께서 방금 전에 이 중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팔 것이라는 끔찍한 말씀을 하셨는데, 마침 무장한 군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깊은 밤에 수많은 군대들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나타났다. 어쩌면 우리까지도 잡아가거나 죽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데 저 앞에 서 있는 놈은 누구야. 가룟 유다 아니야. 저 배신자 같으니라고!


그렇지 않아도 혈기가 왕성했던 베드로가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행동했다고 보기는 힘들겠지요. 몰려오는 공포심과 가룟 유다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는 대단히 흥분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들고는 닥치는 대로 휘둘렀을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쩌다가 우연히 그 중 한 군인의 귀를 베어버렸을 것입니다. 이제 큰 일 났습니다. 본래 대제사장이 보낸 군인들의 목적은 예수님 한 분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그들이 보기에 그야말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피해가 발생했다고 하면 이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자칫하면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까지도 붙잡혀 갈 수도 있게 되거나, 더 나아가서 군대가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기 시작한다면 더 끔찍한 일이 발생하게 될 수도 있는, 말하자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누가복음 22장 51절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するとイエスは、「やめなさい。そこまでにしなさい」と言われた。そして、耳にさわって彼を癒やされた。

예수님께서는 귀가 잘린 대세자장의 군인인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 말고를 위해서 고쳐주셨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좀 어려운 말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민법상으로 보면 손해를 당한 것이 있을 때 배상이나 보상을 청구할 수가 있는 것처럼, 형법상으로 볼 때에는 피해를 당한 것이 있을 때 경찰에 신고를 할 수가 있습니다.


조금 말이 이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누군가를 때렸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내 행위에 의해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피해가 발생해야지만 처벌을 할 수가 있겠지요. 아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처벌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상황을 보더라도 베드로의 행위로 인해서 말고의 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말고는 귀가 완전히 회복된 상황에서 베드로를 끌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해야겠지요.

즉, 예수님께서는 말고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베드로를 위해서,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을 위해서 그의 귀를 고쳐주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を取る者はみな剣で滅びます。

사실 인간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칭찬을 받아야지요. 아니, 베드로가 왜 칼을 뽑았습니까. 예수님을 지키려고 그 서툴기 짝이 없는, 솔직히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도 모르는 칼을 겁도 없이 뽑아 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꾸짖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그와 같은 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검을 써서 상대방을 공격할 생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고로 검이라고 하는 것, 동양에서는 도라고 하지요. 검이나 도를 보면 예술적인 가치도 있고, 누가 만들었는지에 따라서도 그 값어치가 달라진다고 합니다만, 그 본래 목적은 사람을 공격하는 것, 사람을 해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새겨진 조각이나 문양 같은 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리고 금은보화로 장식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검이나 도의 본래 목적인 공격을 할 수 없다면 이는 그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 번에 한 명을 해칠 수 있는 무기보다는 한 번에 두 세 명을 해칠 수 있는 것이 뛰어난 검이고, 한 번에 열 명, 백 명을 해칠 수 있는 검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을 전혀 사용할 생각이 없다면 칼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검을 가지고 있다면, 필요할 때가 되면 언제든지 그 칼을 칼집에서 뽑아서 상대방을 공격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 바로 그와 같은 검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그 검을 가지고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칼이라고 하는 것이 꽤 무겁습니다. 옛날 일본 사무라이들 보면 평소에도 항상 왼쪽에 두 자루의 칼, 하나는 길고 또 하나는 짧은 것인데, 이를 항상 꽂고 다니니까, 사무라이들은 좌우의 발바닥 크기가 달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거운 칼을 항상 꽂고 다니는 왼쪽 발바닥이 오른쪽에 비해 더 컸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무겁고, 그러다 보니 몸에 부담도 많이 가는 무기였던 것이지요.


그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떤 위험이 닥쳤을 때 그 무기를 쓴다면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아주 긴급할 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면 그처럼 무겁고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것을 들고 다닐 필요는 전혀 없겠지요. 그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그 무기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무기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정리하자면 칼이라는 것은 첫째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둘째로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니, 기껏 가지고 있는 칼을 쓰지 말고 칼집에 꽂으라고 하세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잠시 화제를 좀 바꾸어볼까요?

자,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잘 들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あなたの隣人を愛し、あなたの敵を憎め』と言われていたのを、あなたがたは聞いています。

문제입니다. 구약의 율법 중에서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는 율법이 있다? 없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레위기 19장을 보시겠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は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民の人々に恨みを抱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을 원망하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장 39절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第二の戒めも、それと同じように重要です。

보십시오.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 때 말씀하시기를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는 것을 너희들이 들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입니다만,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사람들이 말씀을 안 읽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안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 이것 어디서 들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즘 사람들이 성경을 안 읽는데요. 그리고 특별히 말씀을 전해야 하는 목사님들이 성경말씀을 안 읽는다는 것입니다.

설교준비를 위해서 성경을 펼치는 것은, 그것은 읽는 것이 아니지요. 아무리 교양서나 기독교서적을 읽는다 하더라도, 아무리 찬송과 금식과 기도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혀 있지 않는다면, 올바른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금식도 많이 했지요. 그러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백성들도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ですから、明日のことまで心配しなくてよいのです。明日のことは明日が心配します。苦労はその日その日に十分あります。

참 얼마나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까.

자, 그렇다면 오늘의 두 번째 문제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더러 염려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더러 염려를 하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을까요. 없을까요.

마태복음 5장 25절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あなたを訴える人とは、一緒 に行く途中で早く和解しなさい。そうでないと、訴える人はあなたを裁判官に引き渡し、裁判官は下役(したやく)に引き渡し、あなたは牢 に投げ込まれることになります。

우리가 누군가와 다툼이 생겼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공격해옵니다. 나를 해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반드시 이겨야겠지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강하고 담대하라. 주님을 믿고 당당히 나가서 싸워서 이기자.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더러 염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고발하는 놈이 이웃이에요? 아니에요. 원수입니다. 그렇다면 믿습니다! 하면서 당장 싸워야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 그러지 마. 싸우지 말라고. 너 좀 걱정 좀 해봐. 저놈이 너를 옥에 가둘지 모른단 말이야.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해? 너 지금 당장 가서 빨리 화해 해.

그러면 우리는 뭐라 그래요? 아니, 예수님, 나 예수님을 믿는다니까요.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멘!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야, 듣기 싫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서 화해 해. 더 늦기 전에 빨리 가서 화해 하란 말이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 바로 앞에 있는 말씀도 한 번 살펴볼까요?

마태복음 5장 23절~24절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ですから、祭壇の上にささげ物を献げようとしているときに、兄弟が自分を恨んでいることを思い出したなら、
ささげ物はそこに、祭壇の前に置き、行って、まずあなたの兄弟と仲直りをしなさい。それから戻って、そのささげ物を献げなさい。


여러분, 하나님이 먼저입니까. 이웃이 먼저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당연히 하나님이 먼저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기서 예물을 제단에 드린다는 것은, 말하자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배를 드리다가, 아차, 내가 형제한테 잘못한 것이 생각났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그 사람한테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래요? 그렇습니다. 예배를 드리다 말고라도 좋으니까 어서 가서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해하고 나서 다시 와서 예배를 드리던지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적(対抗)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대적해야 합니까.

야고보서 4장 7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ですから、神に従い、悪魔に対抗しなさい。そうすれば、悪魔はあなたがたから逃げ去りま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대적(対抗)해야 할 상대는 우리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 형제 자매가 아닙니다. 바로 마귀 사탄을 대적(対抗)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 사탄한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이웃 형제 자매는 아닙니다. 대적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화해해야 할 상대요, 화목해야 할 상대입니다. 우리 이웃을 마귀 사탄이라 생각하고 칼을 뽑았다면 어서 다시 칼집에 꽂고는 더 늦기 전에 화해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칼을 쓰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세상적인 지식과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법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 풍요로운 삶, 행복한 삶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이 축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맨날 가난하게 살고, 몸도 안 좋아서 맨날 병원 신세를 지고 사는데, 그러면서 이웃더러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잘 믿으면 저처럼 되요” 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우리는 잘 살아야 합니다. 풍요롭게 살아야 합니다. 강건해야 합니다. 이 모든 축복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그저 세상적인 것만을 의지합니다. 세상적인 지식, 세상적인 재산, 세상적인 경험, 세상적인 명예만을 의지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한 삶,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무거운 칼을 차고 다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잠언 3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心を尽くして主に拠り頼め。自分の悟りに頼るな。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あの空しいだましごとの哲学によって、だれかの捕らわれの身にならないように、注意しなさい。それは人間の言い伝えによるもの、この世のもろもろの霊 によるものであり、キリストに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지혜, 하나님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부정하는 인간의 전통은 모두 초등학문이며, 그와 같은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명철은 무엇입니까.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恵の初め、聖なる方を知ることは悟ることである。

주님을 경외하는 것, 주님을 아는 것, 주님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참된 명철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아니래요. 그건 명철이 아니라 미련한 짓이라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은 어제 오늘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主を恐れることは知識の初め。愚か者は知恵と訓戒を蔑(さげす)む。


벌써 이 옛날부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훈계를 멸시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十字架のことばは、滅びる者たちには愚かであっても、救われる私たちには神の力です。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멸시하면서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본 속담 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과 담배의 좋고 나쁨은 연기가 될 때가지 모른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담배는 불을 붙여서 피워 봐야, 그리고 사람은 죽고 나서 화장을 해봐야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아직은 몰라. 뭐든지 끝까지 가봐야 알아.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가봐야 아나요?

만약에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안 달리셨어요. 장차 미래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수도 있고, 안 달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도 장담 못하지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주신다면 우리의 죄가 모두 해결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우리의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죄는 그대로 있고,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의 죄값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끝까지 안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귀한 보혈을 한 방울도 남김 없이 흘려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끝까지 가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칼을 가지는 자는 어떤 사람이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そのとき、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剣をもとに収めなさい。剣を取る者はみな剣で滅びます。

그렇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이웃 형제 자매를 공격하고 세상적인 힘과 지식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다 칼로 망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칼 대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신 십자가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만이 살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이웃을 공격할 칼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 대신 의지할 세상적인 힘과 돈과 명예가 있습니까. 어서 더 늦기 전에 그 칼을 빨리 칼집에 꽂으셔야 합니다. 다시는 뽑아서도 건드려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칼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고,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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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호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