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6회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2020년 8월 9일 설교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1절 신약 257페이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ローマ人への手紙 12章 21節
“悪に負け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ちなさい。”

한국어 동영상
https://youtu.be/He2IB84Lpac

일본어 동영상
https://youtu.be/ZLXNHwRhNqk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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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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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善をもって悪に打ち勝つ方法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SNS를 이용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도 페이스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참으로 많은 글들이 올라옵니다. 페이스북에 보면 최대 5000명까지 친구를 맺을 수가 있는데, 저와 연결된 친구 수는 거기에 한참 못 미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수많은 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정말 참 놀라운 일이지요. 그만큼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싶은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글들을 보면 어찌된 일인지 무엇인가에 대해서 화가 잔뜩 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이것이 잘못됐다, 저것은 저것을 뜯어 고쳐야 한다 하고 열변을 토합니다. 상대방을 칭찬하는 글보다는 오히려 비판하고 비난하는 글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이런 말들이 주를 이루는 곳은 아무래도 정치판에 비할 수가 없겠지요. 한국이나 일본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다당제를 취하고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이 여당은 야당을 비판하고 야당은 여당을 비판할 것입니다.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당제를 부정하고 일당독재를 하는 나라들이 정치적으로 보면 더욱 부작용이 많다고 하겠지요. 서로 상대방을 주목하고 비판할 부분이 있으면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건전한 정치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비판만 있다면 이것도 문제겠지요. 가장 좋은 것은 비판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보다도 먼저 구체적인 정책을 제안하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간에 평가를 해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서 무슨 정책이나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그저 무조건 비판과 비난 일색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선거 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 자신들의 정책, 자신들의 공약을 내세우기보다도, 때로는 상대방을 헐뜯고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정치하시는 분들이 교양이 없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학력이나 경력을 보면 참으로 화려한 경우가 적지 않지요. 대부분이 그야말로 상위 몇 프로에 해당될 정도로 고학력입니다.

그렇다면 배울 만큼 배우고 교양도 쌓을 만큼 쌓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선거 같을 것을 보면 서로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그러는 것일까요. 이유야 간단합니다. 그것이 선거에 있어서 자신의 지지를 효과적으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내가 좋은 말을 합니다. 그러면 내 지지가 1표 늘어난다고 가정을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비난을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의 이미지가 깎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지지는 -1표, 그리고 상대방의 안 좋은 부분을 지적하니까 자신이 옳다고 강조할 수 있기 때문에 +1표, 이렇게 되면 2표가 늘어나게 됩니다.

즉, 나 혼자 좋은 말을 하는 것보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 두 배의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 분들이 못 배워서나 머리가 안 좋아서 그렇게 교양 없이 서로를 헐뜯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단히 효과적인 전술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상대방을 비난하면, 자기는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한테는 약점이 없나요? 자기 자신은 상대방에 비해서 오점도 없고 잘못도 없고 완벽한 인생을 살아왔나요?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로 형편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속적인 것에 한 번도 물든 적이 없습니다. 항상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왔습니다.

레위기 11장 45절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神となるために、あなたがたをエジプトの地から導き出した主であるからだ。あなたがたは聖なる者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わたしが聖だからである。」

이와 같은 말씀을 지키면서 하루하루 순간순간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성경말씀으로 묵상하고 찬송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복음을 전하고는, 밤이 되면 감사와 기도로 잠이 듭니다.

여러분도 저를 본받아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분들은 뭐 워낙 배려심이 많으신 분들이시니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아, 그런가 보다, 아멘, 하고 은혜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를 보아오셨던 부모님, 이 말씀을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젊은 날의 친구 선후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 집사람이 뭐라 그러겠습니까.

“거룩? 웃기고 있네”

라고 안 그러겠습니까. 내가 자기를 아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면서 당연히 비웃겠지요.


그러면 제 주변 사람들만 저를 비웃을 것 같으십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날 심판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15절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また私は、死んだ人々が大きい者も小さい者も御座 の前に立っているのを見た。数々の書物が開かれた。書物がもう一つ開かれたが、それはいのちの書であった。死んだ者たちは、これらの書物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したがい、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海は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死とよみも、その中にいる死者を出した。彼らはそれぞれ自分の行いに応じてさばかれた。
それから、死とよみは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これが、すなわち火の池が、第二の死である。
いのちの書に記されていない者はみな、火の池に投げ込まれた。

여기에는 두 권의 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 기록된 책이고 또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한 모든 행위는 이 책에 기록되어 있고 지금 이 순간도 이 기록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행동들을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지금까지 거룩하게만 살아왔다는 말을 했을 때,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들으시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역시 “웃기고 있네” 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보면, 돈을 주세요, 집을 주세요, 차를 주세요, 하는 기도도 중요합니다만, 만약에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인생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고, 거룩하고 완벽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는 꼭 한 번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가 생각하기에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생각되는데, 혹시 만에 하나 부끄러운 점이 있었다면 생각나게 해주십시오.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렸을 때 주님께서 응답을 해주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어?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보여줄게. 자, 책 아무데나 한 번 펴볼까. 하고 펴신 다음에 주님께서 한 줄 한 줄 읽어가십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얼굴이 화끈화끈 거립니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립니다. 주위를 보니 주님께서 읽으시는 것을 수많은 천사들과 수많은 천국 백성들이 다 듣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로마서 2장 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ですから、すべて他人をさばく者よ、あなたに弁解の余地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他人をさばくことで、自分自身 にさばきを下しています。さばくあなたが同じことを行っているからです。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사람에 따라서는……이라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 대신 <누구를 막론하고> 즉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너도 똑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야말로 행실이 완벽해서 주님의 십자가 없이도 스스로 구원을 받을만한 사람이 의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시대에 의인이 몇 명이나 있다고요?

로마서 3장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次のように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義人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그렇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척을 해 봤자, 아무리 청렴 결백한 척을 해 봤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이봐. 너나 그 쟤나 똑같잖아. 너도 그걸 잘 알잖아. 몰라? 그럼 그 책을 한 번 읽어줄까?

이렇게 말씀을 안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ですから、主が来 られるまでは、何についても先走ってさばいてはいけません。主は、闇に隠れたことも明るみに出し、心の中のはかりごとも明らかにされます。そのときに、神からそれぞれの人に称賛が与えられるのです。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정죄한다는 뜻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는 저게 나쁘다. 너는 저게 잘못되었다고 정죄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요? 예,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판단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누군가를 미워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그 사람은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을 잡아다가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경찰한테 말합니다.

“경찰 아저씨, 이 녀석은 정말 나쁜 놈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징역 10년을 선고합니다.”

그러면 경찰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제가 데리고 온 사람을 교도소에 가두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가 뭔데?”라고 비웃겠지요. 그 정도면 다행이게요? 반대로 제가 잡혀가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그 경찰아저씨는 왜 저를 비웃었을까요. 그렇지요. 제가 판사입니까? 제가 뭔데 그 사람을 잡아가지고 징역 5년이다 10년이다 판단하고 가두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물며 판사라고 해도 아무 사람이나 잡아다가 선고를 내릴 수가 없지요. 정해진 재판 절차에 따라서 행해질 때에만 그 행위가 유효합니다.

자, 답답합니다. 분명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일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물론 현행법을 어겼다면 경찰에 신고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종류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제 마음에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주었어요. 너무나도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어요. 제 마음 속에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도 말고 판단하지도 말고 정죄하지도 말래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신명기 32장 35절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復讐と報復はわたしのもの。それは彼らの足がよろめくときのため。彼らのわざわいの日は近く、来たるべき時が速やかに来る。」

이 기록에 대해서 로마서와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먼저 로마서부터 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愛する者たち、自分で復讐してはいけません。神の怒りにゆだねなさい。こう書かれているからです。「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主はそう言われます。

다음으로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0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私たちは、「復讐はわたしのもの、わたしが報復する。」また、「主は御民をさばかれる」と言われる方を知っています。

누군가가 너에게 상처를 줘도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너는 그냥 참고 있어라. 왜냐하면 너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묵묵히 참고만 있어야 한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걱정 말아. 너 대신 내가 갚아 주겠다. 내가 원수를 갚아 주겠다. 내가 억울함을 갚아 주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답답해하고 억울해하고 속상해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악을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과 또 하나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요? 예, 있습니다. 일본 인기 드라마인 한자와 나오키에서 나온 유명한 대사가 있었지요? 倍返しだ. 두 배로 갚아주마. 이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이게 가장 통쾌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내가 당한 것의 두 배로 너한테 해주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만약에 상대방이 나한테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방이 나한테 100이라는 죄를 지었어요. 이로 인해서 나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 배는 아니더라도 그대로 되갚아준다고 하면 나 또한 100이라고 하는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두 배로 갚아준다면 200이라고 하는 죄를 지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와 같은 죄를 짓는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하지 말아. 내가 할 거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판단해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원수를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판단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판단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진정으로 판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는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 넘긴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힘들게 판단할 필요도 비난할 필요도 없습니다.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수를 갚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판단을 다 해주시고, 원수 갚을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주실 테니까, 억울함을 풀어주실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억울함을 풀어주실 테니까, 이를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인 것입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나쁜 사람인데, 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떵떵거리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어요.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화가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속이 터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벌을 내리실 일이 있으면 벌을 내리실 것이요,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회개를 해서 나한테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하면 우리가 화목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안에는 고통이나 괴로움 대신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 우리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피해 다녀야 하나요? 하나님이 언제 벌을 내리실지 숨어서 지켜보면서 살아가야 하나요?

성경은 기록합니다.

로마서 12장 20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次のようにも書かれています。「もし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なぜなら、こうしてあなたは彼の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ことになるからだ。」


여기서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는다(頭上に燃える炭火を積む)”는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은혜를 베푼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るなら食べさせ、渇いているなら飲ませよ)”는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한테보다 원수한테 특별히 잘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원수든 아니든 똑같이 대하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요즘은 법을 꼭 전공하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법률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 같아서, 이른바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말씀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형사 재판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되지 않는 한, 그 사람한테는 죄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유죄가 확정되기 전이라 하더라도, 도주의 우려가 있거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거나 하면 구속될 수가 있습니다만, 그래도 원칙적으로 범죄인 취급을 하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우리 이웃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판단하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는 생각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죄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우리 주변의 다른 이웃처럼 그가 배고파 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른다고 하면 물을 주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제 유죄판결을 내렸어요. 그러면 이제 우리도 그 사람을 죄인취급 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요. 못합니다.


억울하신가요? 아니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판결 전에 회개한다면 우리와 다시 만나서 화목(和解)할 수 있겠습니다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영원히 만날 수가 없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악으로 악을 이겨서는 안 됩니다. 악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우리가 당한 악보다도 훨씬 더 심한 악을 행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주님께서는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했는데, 그러시기까지 하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는데, 또다시 우리가 죄에 물들게 된다면 얼마나 주님께서 슬퍼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악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 인해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삶, 평안과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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