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회 예수님과의 만남
2020년 10월 4일 설교 (로마서 강해 5)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9절~12절 신약 239페이지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9節~12節
“私が御子の福音を伝えつつ心から仕えている神が証ししてくださることですが、私は絶えず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い、
祈るときにはいつも、神のみこころによって、今度こそついに道が開かれ、何とかし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けるようにと願っています。
私があなたがたに会いたいと切に望むのは、御霊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あなたがたを強くしたいからです。
というより、あなたがたの間にあって、あなたがたと私の互いの信仰によって、ともに励ましを受けたいのです。”


한국어 동영상


일본어 동영상

 

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한 달에 1,000원>
<물 한 그릇 선교후원>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KB 국민은행
079-21-0736-251
홍성필



성경소설 <요셉의 재회> 다운로드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5번째 시간으로서 “예수님과의 만남” イエス様との出会い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에서 9절~10절까지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9절~10절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9.私が御子の福音を伝えつつ心から仕えている神が証ししてくださることですが、私は絶えずあなたがたのことを思い、
10.祈るときにはいつも、神のみこころによって、今度こそついに道が開かれ、何とかし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けるようにと願っています。

이 말씀은 우리가 시간 관계상 적어도 두 가지 시각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 바울의 시각입니다. 그는 이제 이방인 선교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이방인에게 주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상황에 보더라도, 물론 국내 선교를 보면 대단히 어렵습니다. 일본처럼 기독교인구가 적은 나라만이 아니라 한국이나 미국처럼 기독교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목회를 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 나라에서 목회를 하게 될 경우 외국에서 하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아무래도 문제될 부분이 좀 적기는 하지요.


무엇보다 외국에서 선교를 하게 된다면 비자 문제가 걸리게 됩니다. 요즘은 며칠이나 몇 개월 정도 관광으로 외국을 방문한다면 무비자로 갈 수 있는 곳도 많지만, 그 나라에 정착하면서 선교활동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비자를 발급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게 나라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바뀌기도 하고 하니 해외에서 사역하고 계신 분들 중에서, 이 비자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아마 안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저희도 사실 이 비자문제 때문에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서 도합하면 한 5개월 정도나 이산가족이 된 상태로 지내야 했었습니다. 입국관리국도 여기 군마현에 있는 다카사키 출장소에도 갔다가, 동경에 있는 입관에도 갔다가, 거기서는 담당자와 면담까지도 하기도 하고 해서 아무튼, 지난 2018년에는 1년 동안 그 비자문제 때문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이고 정말 얼마나 막막해지는지 모릅니다.

해외선교에 대한 어려움은 물론 지금과 바울 당시 때와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았을 때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외국에 간다는 것이 국내에서의 이동보다 어려움이 동반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기를 간절하게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말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사모하고 방문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때로는 아무도 안 알아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외롭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시각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 만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꿈이나 환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요. 뭐, 만나셨다고 하니 정말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무슨 흔한 그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저는 모르지요. 저 뒤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저기 중심이 예수님이라고 해요. 저 그림을 본다 하더라도 글쎄요.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옷이라도 좀 입고 계시지 왜 저렇게 벗고 계실까 하는 마음 밖에 들지 않습니다.

다빈치가 그린 그림을 보아도 글쎄요. 이런 말을 하면 좀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지는 모르지만, 남들이 명화다 뭐다 하니까 그렇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좀 표정들이 대체적으로 무서워요. 어떻게 좀 더 자연스럽게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기도를 합니다. 금식을 합니다. 기도원에 갑니다.

물론 기도를 하는 것 중요합니다. 금식을 하는 것도 성경적인 것이지요. 저도 기도원에 몇 번 가보았습니다만, 거기 가면 일상에서 떠나와서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기도 하고 예배를 드리기도 해서 꽤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예수님은 금식을 해야지만 만날 수가 있을까요. 산속에 가야지만 만날 수가 있을까요.

남녀가 연애를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서로간에 있어서 어느 쪽이 상대방을 더 보고 싶어할까. 그래서 아무래도 상대방이 나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보다 내가 더 보고 싶어하면 왠지 손해를 본 것 같고 자존심이 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런 이야기도 한다고 해요. 남녀가 연애를 할 때, 맨 처음에 누가 먼저 좋아했냐 하는 것이죠. 이럴 때에도 서로 미룬다고 하지요? 네가 먼저 좋아했다. 아니다 네가 먼저 좋아했다. 뭐, 그러면서 다투기도 한다고 합니다. 뭐, 이런 건 다툰다 라고 하기 보다는 그냥 사랑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예수님과 나, 어느 쪽이 서로를 보고 싶어 할까요. 어느 쪽이 먼저 서로를 사랑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예수님 믿기가 쉽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고 은혜가 넘치고 축복이 넘쳐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가끔 보면 어떻게 된 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다들 잘 살고, 그래도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잘 믿어보려고 하는 나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이고, 도대체 예수님을 믿지 않은 누구누구는 저렇게 떵떵거리고 잘 사는데, 예수님을 믿는 나는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만 생깁니까. 좀 어떻게 해보세요!”

솔직히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예수님 입장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누가 나 믿으라 그랬어? 네가 좋다고 네 마음대로 믿었던 것 아냐. 그런데 왜 내가 너를 책임져야 하는데? 싫으면 관두면 될 거 아니야!”

뭐,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 입장에서 본다면 마음이 가벼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고 계신가요?

요한복음 15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あなたがたがわたしを選んだのではなく、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選び、あなたがたを任命しました。それは、あなたがたが行って実を結び、その実が残るようになるため、また、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父に求めるものをすべて、父が与えてくださ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

참 은혜롭지 않습니까.

“그래.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야. 내가 너희를 택한 거야.”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요한일서 4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私たちは愛しています。神がまず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택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 내가 너를 먼저 택했어. 내가 너를 먼저 사랑했어. 그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다 책임져줄게. 내가 다 해결해줄게…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지요. 아니, 그러면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나요? 예수님 믿는 나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면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런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잠언 24장 1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悪い者たちを羨んではならない。彼らとともにいることを望んではならない。

잠언 24장 19절~20절
“19.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20.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悪を行う者に対して腹を立てるな。悪しき者を羨むな。
悪者には将来がなく、悪しき者のともしびは消えるからだ。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잠언이 적힌 시기는 솔로몬 왕 때이니까 대략 기원전 9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900년 이상 옛날에도 지금과 똑같이 악인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있는 군마현에서 볼 때 한국은 서쪽에 있습니다. 여기 한국에 가려는 두 사람이 있었어요.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합니까. 그렇죠. 목적지인 한국이 서쪽에 있으면 서쪽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있어요. 사람들은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습니다.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아니, 바보같이 한국은 동쪽인데 왜 서쪽으로 가고 있어?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니까 서쪽으로 간 사람은 한국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동쪽으로 간 사람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서쪽으로 간 사람은 자기 힘으로 열심히 뛰어갔고, 동해바다를 자기 힘으로 헤엄쳐서 건너려고 하다가 그만 빠져버렸지만, 동쪽으로 간 사람은 거기에 있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먼저 날아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앞에 있는 일만 가지고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옳지 않은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요.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광야로 나왔을 때 다툼이 생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결별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롯에게 먼저 길을 택하라고 합니다. 네가 가는 길을 먼저 택하면 나는 그와 다른 길을 가겠다.

그러자 롯은 어떤 길을 택하게 됩니까.

창세기 13장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ロトが目を上げてヨルダンの低地全体を見渡すと、主がソドムとゴモラを滅 ぼされる前であったので、その地はツォアルに至るまで、主の園のように、またエジプトの地のように、どこもよく潤っていた。

사막에서는 무엇보다도 물이 많은 곳이 좋은 땅이지요. 그런데 요단 지역을 바라보니까 물이 넉넉해서 그 모습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애굽 땅처럼 보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롯은 탁월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땅이 어디였다고요? 그렇습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죄악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와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참된 진리의 길을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따르지 않습니다. 자꾸만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합니다. 자꾸만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호세아 11장 8절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エフライムよ。わたしはどうしてあなたを引き渡す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イスラエルよ。どうしてあなたを見捨て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どうしてあなたをアデマのように引き渡す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どうしてあなたをツェボイムのようにす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か。わたしの心はわたしのうちで沸き返り、わたしはあわれみで胸が熱くなっている。

여기서 <아드마(アデマ)>와 <스보임(ツェボイム)>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던 성읍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너희들 어떻게 소돔과 고모라 같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느냐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상한 말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먼저 택해버린 것이 잘못이요. 먼저 사랑한 것이 잘못이지요.
先に選んしまったのが運の尽き、先に愛してしまったのが運の尽き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그렇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먼저 택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먼저 만나러 오셨습니다. 제아무리 길이 험하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시는 것보다 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아무리 많은 것을 포기했다 하더라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보다도 더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시고 그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이 있었나요? 아니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이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해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장 11절~12절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私があなたがたに会いたいと切に望むのは、御霊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あなたがたを強くしたいからです。
というより、あなたがたの間にあって、あなたがたと私の互いの信仰によって、ともに励ましを受けたいのです。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니까 일본의 한 패럴림픽 대표선수를 소개하는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수의 좌우명을 써달라고 하니까 “기적은 없다”라고 적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말은, 오로지 연습만이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연습 없이 게으름을 피워도 승리를 할 수 있다는 기적이란 없다는 뜻입니다. 운동선수의 말로서 본다면 정말 멋진 말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삶으로 보았을 때에는 어떻습니까. 지금 이 코로나인지 뭔지가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이 해결해줍니까. 뉴스에 보면 돈 많은 사람들도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영국이나 브라질 총리도 코로나에 걸렸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며칠 전에 보니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영부인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다고 합니다. 백악관이 어떤 곳입니까. 핵전쟁이 나도 무사하다고 하는 곳이 백악관입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미국 대통령이 타는 전용차량은 별명이 비스트, 짐승, 야수라고 하는데, 정말 짐승이나 야수라 불릴 정도로 탄탄하고 웬만한 폭탄에도 끄떡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할 때에는 이 자동차까지도 비행기로 운반한다고 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을 씁니다.

자고로 미국 대통령에 대한 경호는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권력, 세계 최강의 군 통수권자인 미국 대통령도 이를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보니 창세기에 나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내보내려고 하는데 바로 왕이 이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에 있는 모든 가정의 장남들이 죽었습니다. 이는 서민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바로의 장남까지도 무사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미국 대통령이 바로 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 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돈이나 권력보다도 기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코로나 이전에도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마치 깊은 늪 속에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회복될 기미가 안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면,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그 늪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 놀라운 축복을 부어 주시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계시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에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갖고 서로가 안위함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 인해서 믿음을 통해 힘을 얻게 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영적인 축복, 영적인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 속에서 막혔던 것이 뚫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수많은 선택이라는 이름의 문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문들은 때로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문과,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문입니다. 축복의 문과 저주의 문, 생명의 문과 멸망의 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선택하시겠습니까. 여기서 가장 믿을만하지 못한 방법은 다수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장 13절~14절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狭い門から入りなさい。滅びに至る門は大きく、その道は広く、そこから入って行く者が多いのです。
いのちに至る門はなんと狭く、その道もなんと細いことでしょう。そして、それを見出す者はわずかです。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찾는 자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다수결로 선택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만 올바른 선택의 문을 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見よ、わたしは戸の外に立 ってたたいている。だれでも、わたしの声を聞いて戸を開けるなら、わたしはその人のところに入って彼とともに食事をし、彼もわたしとともに食事をする。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드리는 문을 여시면 됩니다. 그 문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문이요, 기뻐하시는 문이요, 축복의 문이요, 생명의 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우리 삶 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문, 축복의 문, 생명의 문을 활짝 열므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맛 보고, 주님과 함께 생명의 길, 축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255회 갚아야 할 빚 →

← 제253회 예수님 것으로서의 사명

 

이카호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