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회 갚아야 할 빚
2020년 10월 11일 설교 (로마서 강해 6)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14절 신약 239페이지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ローマ人への手紙1章13節~14節
“13.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 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14.私は、ギリシア人にも未開の人にも、知識のある人にも知識のない人にも、負い目のある者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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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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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와 섬김이,
선교의 횃불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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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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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6번째 시간으로서 “갚아야 할 빚” 返すべき負債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에서 로마서 1장 13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3절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兄弟たち、知らずにいてほしくはありません。私はほかの異邦人たちの間で得たように、あなたがたの間でもいくらかの実を得ようと、何度も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 計画を立てましたが、今に至るまで妨げられてきました。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서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에 대해서 13절에서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러분, 식물에 있어서 열매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식물의 최종적인 결과물,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인 <성과>라는 말도 한자로 쓰면 과실이 난다는 뜻입니다.

요즘도 과수원 농장에서 농민 분들이 더울 때나 추울 때나, 개인 날이나 눈비가 내리는 날이나 정성을 다해서 식물들을 가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것도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아무리 비싼 나무라 하더라도, 아무리 보기 좋은 나무라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농부들이 열심히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런 결과를 내지 않는 나무를 키워봤자 이는 돈 낭비, 체력 낭비, 시간 낭비, 그리고 좋은 밭, 토양 낭비일 뿐입니다.

이는 성경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 18절~20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良い実を結ばない木はみな切り倒されて、火に投げ込まれます。
こういうわけで、あなたがたは彼らを実によって見分けることになるのです。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안 좋은 나무인지는 다른 것을 볼 필요가 없어요. 오로지 열매가 좋으면 그 나무는 좋은 것이요, 열매가 안 좋으면 그 나무는 안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중고등학교 때에는 프로야구도 참 좋아하고 그랬었습니다만, 요즘은 뭐, 워낙 볼 시간이 없다 보니, 가끔 보면 한국이나 일본 야구나 축구를 보더라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런데 가끔 한국 축구 시합을 보면 해설하시는 분이 그런 말을 해요. 우리나라 축구는 다 좋은데 골 결정력이 없대요. 제가 운동경기 같은 데에 워낙 문외한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본래 축구가 뭘 하는 경기예요. 공을 상대방 골에 넣어야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건 다 좋은데 골 결정력이 없다……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최악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개개인의 기술력이 좋다 하더라도, 아무리 선수들의 체력이 뛰어나거나, 하물며 아무리 선수들의 얼굴이 잘생겼다거나 인간성이 참 좋다고 하더라도, 축구 시합에서 골을 넣지 못하고 맨날 지기만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야구 선수가 정말 잘생기고 팬 서비스도 잘하고 다 좋은데 시합에서 타자가 공을 치지 못해요. 아니면 투수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해요. 만약에 그런 선수가 있다면 프로 운동 선수로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장점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 쓸모가 없게 되어서 소속팀으로부터 버려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을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절~14절
“12.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翌日、彼らがベタニアを出たとき、イエスは空腹を覚えられた。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その木に何かあるかどうか見に行かれたが、そこに来てみると、葉 のほかには何も見つからなかった。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するとイエスは、その木に向かって言われた。「今後いつまでも、だれもおまえの実を食べることがないように。」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いた。

이 말씀, 어떠십니까. 누구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배도 안 고프시고 아픔도 안 느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100% 하나님과 100% 인간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이 아픔도 느끼시고 우리와 똑같이 허기도 느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도 아시고 우리의 고통도 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채찍에 맞아도 아프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혀도 아픔을 느끼지 않으신 게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뼈와 살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느끼는 아픔을 그대로 모두 느끼시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 인간이 느끼는 고통을 그대로 모두 느끼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나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가 있나 하고 보셨는데, 아무 것도 찾지 못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나무더러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고 저주를 하십니다. 그러자 11장 20절에 의하면 그 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참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좋아요. 뭐, 예를 들어서 집에 있을 때 배가 고팠어요. 그래서 냉장고를 열어봤는데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럼 어떻겠습니까. 좀 화가 나거나 할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도 아마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배고플 때 무화과 열매가 없었다고 해서 나무를 말라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왜 열매가 없었대요?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3절 끝에 뭐라고 적혀 있어요.

마가복음 11장 13절 끝부분.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いちじくのなる季節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예수님, 이건 정말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무화가 나무에 열매가 없었던 것은 그 나무 잘못이 아니래요. 아직 열매가 열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열매가 없다고 해서 나무를 말라 죽여버리는 것은,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문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는 성경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1장 13절 첫 부분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葉の茂ったいちじくの木が遠くに見えたので、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에 잎사귀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반대로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에 그 나무에 잎사귀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에게 다가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즉, 그 나무에 잎사귀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열매를 찾으신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대와 달리 그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 열매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해서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무엇에 대해서 화를 내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열매는 없으면서 잎사귀만 있었던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화가 나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만이 아니라 다른 과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무의 줄기가 자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나무가 잎사귀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무 모양을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인가요? 벌레들에게 잎사귀를 먹게 하기 위해서인가요? 아닙니다. 오로지 나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물론 나무에 잎사귀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보기는 좋겠지요. 물론 그 잎사귀를 벌레들이 먹고 자리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부분이지요. 무화과 나무 같은 과실나무에 잎사귀가 나는 최대의 이유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나무가 자라는 것이요, 열매를 맺기 위해 잎사귀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를 보니까 잎사귀만 여기저기 많이 달렸는데, 제일 중요한 열매가 없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잎사귀도 없었다면 좋았을 것을, 쓸데없이 잎사귀만 많이 달린 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심판은 단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나무에 대해서 저주를 하시자 그 나무는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는 프로 축구나 야구선수가 다른 것들은 다 잘하는데 골을 넣지 못한다거나, 점수를 따지 못한다면, 결국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이 무화과나무와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믿음과 말씀과 행함에 대해서도 이 공식은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이 아주 좋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금식도 많이 하고 방언도 유창하게 합니다. 예배도 빠짐없이 참석을 합니다. 그리고 또 신학교도 나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신학교를 졸업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높은 직분도 받았고, 신학서적도 아주 많이 썼어요. 뿐만 아니라 아주 유명한 신학교에서 교수님으로 재직하고 계세요.

이 정도면 대단히 훌륭한 믿음의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분이 목사님인 경우도 있고, 또한 성도님일 수도 있겠지요. 이 정도 배경이면 부족함이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아주 성격이 독특해요. 고집이 셉니다. 남이 하는 말을 안 듣고, 그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지만 봉사도 하지 않습니다. 전혀 교회를 섬기지 않습니다. 이웃 관계도 대단히 안 좋아요. 이웃한테 무엇을 베푸는 것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은 말합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이래봬도 옛날에 어쩌고저쩌고, 내가 무엇을 얼마나 했고 어떻게 했고, 내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고, 내가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고, 내가 금식을 얼마나 많이 했고……하는 자랑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녀요. 이런 것들이 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다 잎사귀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없어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열매가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그 배경이나 학벌이나 경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다 잎사귀일 뿐입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씨를 뿌리고 <말씀>의 물을 빨아들여서 <행함>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좀 알고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행함>이라고 하면 금방 <야고보서>를 떠올립니다. 예, 이는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도 할 정도로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야고보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人の子は、やがて父の栄光を帯びて御使いたちとともに来ます。そしてそのときには、それぞれその行いに応じて報います。

요한복음 5장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善を行った者は、よみがえっていのちを受け、悪を行った者は、よみがえってさばきを受けるのです。


로마서 2장 6절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神は、一人ひとり、その人の行いに応じて報いられます。

디모데후서 4장 14절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銅細工人のアレクサンドロが私をひどく苦しめました。その行いに応じて、主が彼に報いられます。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見よ、わたしはすぐに来る。それぞれの行いに応じて報いるために、わたしは報いを携えて来る。

이와 갈이 행함을 강조한 것은 야고보서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행함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열매>이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금식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등등 이라고 해 봤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 없는 잎사귀 투성이인 무화과나무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우리 안에 강한 믿음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있다 하더라도, 행함이라는 열매가 없다면 이는 또한 모두가 잎사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이를 제가 알려드릴까요? 아니요. 성경에서 이미 여러분께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 14절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私は、ギリシア人にも未開の人にも、知識のある人にも知識のない人にも、負い目のある者です。

이 사실을 여러분께서 알고 계시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빚을 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빚을 졌다고 하냐 하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빚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돈이 되겠지요. 돈을 빌렸으면 당연히 갚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물론 여기서는 돈에 대한 말씀이 아니지요.

마태복음 10장 8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病人を癒やし、死人を生き返らせ、ツァラアトに冒された者をきよめ、悪霊どもを追い出しなさい。あなたがたはただで受けたのですから、ただで与えなさい。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권유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가 아니라, 이렇게 하라……라고 하는 명령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까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거저 받았습니까.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구약 시대 때 과거 아무리 뛰어난 선지자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의 죄가 너무나도 무거우니 하나님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죽게 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소서 하고 기도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겠지요. 첫째는 우리 스스로의 죄가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으면 우리의 죄가 해결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통도, 예수님의 아픔도, 예수님의 보혈도,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마저도 우리는 거저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심판, 영원한 멸망으로 이어져야 마땅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영원한 구원,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되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저입니다. 우리가 10만원을 거저 받으면 기뻐합니다. 100만원을 거저 받으면 더욱 기뻐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말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축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거저로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주셨습니다. 돈을 받고 그렇게 해주셨나요? 아니요. 거저로 그와 같은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거저로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 이웃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속담 중에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들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믿음 안에서 보면 사실인가요?

예를 들어서 중고차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만들어진 지 얼마 안된 차라고 해도, 주인이 많이 바뀌면 수명이 짧아진다고 해요. 그것은 원래 하던 대로 운전을 하는 것이 차에 좋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만년필 같은 경우를 보아도 다른 사람의 것을 쓰면 안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년필을 쓰게 되면 펜 끝이 닳게 되는데, 그게 사람마다 각각 다르대요. 그래서 여러 사람이 쓰게 되면 금새 펜 끝이 닳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뭐예요? 예, 새것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고품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새것이 아니라 중고품이라면 원래 하던 대로 사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성경에는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우리가 중고품이라고 적혀 있나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ですから、だれでもキリストのうちにあるなら、その人は新しく造られた者です。古いものは過ぎ去って、見よ、すべてが新しくなりました。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비교적 깨끗한 중고품이 되었도다……가 아닙니다. 완전한 새것이 된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3장 18절~20절
“18.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先のことに心を留めるな。昔のことに目を留めるな。
見よ、わたしは新しいことを行う。今、それが芽生えている。あなたがたは、それを知らないのか。必ず、わたしは荒野に道を、荒れ地に川を設ける。
野の獣、ジャッカルや、だちょうも、わたしをあがめる。わたしが荒野に水を、荒れ地に川を流れさせ、わたしの民、わたしの選んだ者に飲ませるからだ。

광야는 본래 길이 없습니다. 하물며 사막에도 강은 없어요. 사막에 강이 있다면 이는 사막이 아니지요. 광야에 길을 낸다는 일, 하물며 사막에 강을 낸다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 길이 나면 사람들이 왕래합니다. 그러면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서 그전에는 값어치가 없던 땅에 작은 마을이 생기고 큰 도시가 생겨납니다. 메마른 사막에 강이 생기면 죽었던 땅에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모래바람만 불었던 지역에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고 사람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이는 그 때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안돼. 나는 못해. 나는 부족해. 나는 참 못났어…….이와 같은 모든 일들을 다 잊어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새 일을 행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한 새로운 축복,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줄 때가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보지 못했던 삶,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가 드디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은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문명인이냐 야만인이냐, 지식인이냐 어리석은 인이냐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2절~13절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その家に入るときには、平安を祈るあいさつをしなさい。
その家がそれにふさわしければ、あなたがたの祈る平安がその家に来るようにし、ふさわしくなければ、その平安が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返って来 るようにしなさい。

그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든 안 하든 모든 일은 주님께서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자,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어야 하는 자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이제부터 새로운 삶,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을 갚아 가면서,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을 우리 이웃에게 그리고 전세계에 전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 우리 인생의 광야에 길이 나고 우리 인생의 사막에 큰 강물이 생기는 삶, 큰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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