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회 복음을 전하는 방법
2020년 10월 18일 설교 (로마서 강해 7)

홍성필 목사
http://www.ikahochurch.com
ikahochurch@gmail.com

본문은 실제 설교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5절~16절 신약 239페이지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1章15節~16節
“15.ですから私としては、ローマにいるあなたがたにも、ぜひ福音を伝えたいのです。
16.私は福音を恥としません。福音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信じるすべての人に救いをもたらす神の力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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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41절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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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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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7번째 시간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 福音を宣べ伝える方法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중 15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1장 15절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5.ですから私としては、ローマにいるあなたがたにも、ぜひ福音を伝えたいのです。

이는 바울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로마에 가고자 했던 진정한 목적을 명료하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성경을 통해서 바라본 사도 바울의 삶은 대단히 명확합니다. 그의 삶은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았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축복 받기 위해서 아니었나요? 우리가 좀 더 편안 삶,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었으면 믿었지, 현재보다 더 힘들고 더 고생을 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거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절반 가까이를 기록할 정도로 지식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뜨거웠던 사도 바울이었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평탄했지요. 그는 청년고위관리로서 미래가 유망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서 말하자면 고생길이 시작했습니다. 매도 많이 맞고 죽을 고비를 얼마나 많이 넘겼는지 모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천막을 만드는 일도 했습니다.

청년고위관리로 살았더라면 그런 일을 할 필요도 없었고, 그와 같은 고생을 당할 일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볼 때 그는 그와 같은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불행한 삶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대단히 축복 받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죽음을 앞둔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저는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면 예수님 이후 최초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는 스데반(ステパノ)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58절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しかし、聖霊に満たされ、じっと天を見つめていたステパノは、神の栄光と神の右に立っておられるイエスを見て、
「見なさい。天が開けて、人の子が神の右に立っておられるのが見えます」と言った。
人々は大声で叫びながら、耳をおおい、一斉にステパノに向かって殺到した。
そして彼を町の外に追い出して、石を投げつけた。証人たちは、自分たちの上着をサウロという青年の足もとに置いた。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 그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직후 그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를 하게 되는데,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아직 예수를 모르던 바울, 아직은 사울이라고 불리던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서 죽는 모습을 보고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참으로 미련한 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유대교를 믿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괜히 무슨 예수네 하나님의 아들이네, 뭐네 하는 사람을 믿는 바람에 저렇게 어이없이 돌에 맞아 죽게 되다니 쯧쯧쯧……. 어쩌면 그런 시선으로 스데반의 죽음을 바라보았을 바울이, 이제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마치 스데반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처럼, 이제 자신에게 주실 면류관을 예비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바울의 삶은 지극히 험난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중반부~27절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労苦したことはずっと多く、牢に入れられたこともずっと多く、むち打たれたことははるかに多く、死に直面したこともたびたびありました。
ユダヤ人から四十に一つ足りない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
ローマ人に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労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ずに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の中に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이와 같은 그의 삶에 대해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말했겠습니까. 아이구 참 미련한 사람 같으니라고. 얼마든지 편하게 살아갈 수도 있는데 바보같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왜 저렇게 고생을 하나.

사람들이 이렇게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를 그도 알았겠지요.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もし私たちが、この地上のいのちにおいてのみ、キリストに望みを抱いているのなら、私たちはすべての人の中で一番哀れな者です。

그래. 우리가 길어봐야 100년 정도 밖에 안 되는 삶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리고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로지 이 짧은 생애만 잘 되기를 바라고 살아간다면, 이렇게 평생토록 고생만 하면서 살아가는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라고 돈이 좋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재산이나 이 세상 명예나 권력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돈이나 재산이나 이 세상 명예나 권력이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그리고 그 결과 청년고위관리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고 깨달았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私たちは見えるものにではなく、見えないものに目を留めます。見えるものは一時的であり、見えないものは永遠に続くからです。


이 세상의 부귀영화요? 돈? 재산? 권력?

그런 것들은 잠깐 있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봤자 우리는 100년도 못 되어서 모두 다 버리고 세상을 떠야 하는 운명입니다.

재물도 그렇고 세상적인 명예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얼마나 아깝고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자신이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때로는 경쟁자를 물리치기도 하고, 때로는 냉혹한 짓을 하기도 했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할 시기가 다가오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아깝고 초조할까 합니다.

반면에 바울은 어땠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이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실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는 고백을 할 정도의 인생이라면, 그의 인생은 진정으로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습니까. 수많은 고생을 하기도 하고 고난도 겪었습니다만, 그의 삶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그것은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로마로 가서 바로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복음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私は福音を恥としません。福音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信じるすべての人に救いをもたらす神の力です。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채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고, 우리는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なぜなら私は、あなたがたの間で、イエス・キリスト、しか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のほかには、何も知るまいと決心していたからです。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しかし私には、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以外 に誇りとするものが、決してあってはなりません。この十字架につけられて、世は私に対して死に、私も世に対して死にました。

바울이 이처럼 고백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이를 위해서만 살기를 작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신 이 복음을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이는 무슨 뜻일까요.

이는 상대방이 누구든 간에 나는 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니, 자랑스러운 이 복음을 주저 없이 전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라고 저 사람한테 전하면, 저 사람이 나를 무식하다고 하지 않을까. 바보라고 하지 않을까. 그런 비과학적인 것을 믿는다면서 나를 무시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복음 전하기에 힘쓴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일본 뉴스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어떤 여자분이 운전을 하다가 철도 건널목에 다가가니까, 전철이 지나간다고 해서 소리를 내며 차단기가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자전거를 탄 할아버지가 차단기 안 쪽으로 들어가시더래요. 이 모습을 보고 이 여자분이 자동차에서 황급히 내려서 그 자전거에 탄 할아버지를 간신히 철도건널목 바깥으로 끌어냈어요. 그랬더니 조금 있다가 전철이 지나갔습니다.

이 영상은 이 여자분의 자동차에 부착된 카메라, 드라이브 레코더에 찍힌 모습이었습니다만, 정말로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순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이 여자분은 간호사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빨리 구조하게 되었냐고 하니까, 자기가 옛날에 신입일 때 교육을 받기를, 어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자기가 움직여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고 망설이게 되었을 때에는 빨리 움직이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마음에 배어 있으니까 그 때도 순간적으로 몸이 움직였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만에 하나 몇 초만 더 망설였더라도 이 할아버지는 무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가져야 하는 마음도 바로 이 간호사님이 가졌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복음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무료한 일요일에 교회에서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사느냐 죽느냐,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심판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전철이 오기 전에,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기 전에 빨리 바깥 안전한 곳으로, 빨리 구원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 한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문제입니다. 복음은 어떻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전도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번, 싫다고 해도 교회에 나올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2번, 기타.

사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끈질기게 전도를 해야 한다. 듣기 싫다고 해도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교회에 나올 때까지 매달린다고 하는 방법을 권유하는 곳이 의외로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성경적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시던가요?

마태복음 10장 14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だれかがあなたがたを受け入れず、あなたがたのことばに耳を傾けないなら、その家や町を出て行くときに足のちりを払い落としなさい。

이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있는 관행이었는데 구약에 보면 느헤미야 5장13절, 신약에서는 사도행전 18장 6절에서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옷을 터는 행위는 상대방과 완전히 관계를 끊겠다는 표현인데, 예수님께서는 옷을 터는 정도가 아니라 발에 있는 먼지들까지도 완전히 떨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했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거나, 복음을 전하는 너희들을 거부하는 곳에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지금까지의 많은 교회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어떻게 하든, 무슨 수를 써서든 끈질기게 매달려서 하나라도 많이 데려오면, 교회에서 전도왕이라고 해서 상도 주고 그럽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회사 같은 곳이라면, 그 회사 상품을 많이 팔았거나 해서 상을 준다거나 하면 모르지만, 정말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어떻게 해서든 자기 교회에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은, 이는 그야말로 사람의 힘으로 전도를 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의 힘이나 고집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저도 직접 방문을 하거나, 아니면 전도 메일을 보내거나 할 때,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하면 다시는 안 갑니다. 왜냐하면 말씀 드린 대로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실 때인데 내가 계속해서 하겠다는 것은, 그것은 주님의 일을 내가 방해하는 것 밖에는 안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끔 보면 또 무슨 전도를 하는데 안 되면 이는 마귀가 방해해서 그렇다는 둥, 사탄이 역사해서 안 된다는 둥 해가면서, 마치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을 마귀취급, 사탄취급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보면 무슨 컴퓨터가 이상하면, 어디서 뭐 좀 들었다고 금방 무슨 바이러스 때문이네 해킹 때문이네 합니다. 아니,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바이러스나 해킹은 그리 쉽게 당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과거에 IT쪽에 좀 있었습니다만, 자고로 컴퓨터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컴퓨터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컴퓨터 이용자에 문제가 있거나 하는 경우인데, 컴퓨터 초보자일수록 어느 쪽에 원인이 많겠습니까. 그렇죠. 컴퓨터는 멀쩡한데 쓰는 방법을 잘 몰라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아니, 컴퓨터에서 마우스를 클릭을 해도 프로그램이 안 뜬대요. 그래서 이게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마우스를 두 번 눌러야 하는데 한 번만 누르니 프로그램이 뜹니까? 그럼 이게 컴퓨터 잘못인가요? 아니에요. 컴퓨터 사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 문제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가 전도를 했는데 교회에 안 나온다고 무슨 마귀네 사탄이네,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문제만 있으면 뻑 하면 마귀 탓이다 사탄 탓이다 하면 그 근본원인이 가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아무리 전도를 해도 안 되는 이유는 어쩌면 자기 자신한테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가끔 보면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을 좀 무시하고 있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회사가 고객을 무시하면 상품이 팔리지 않고, 우리가 이웃을 무시하면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안전한 곳,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겠습니다만, 이를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고 한다면 그 누구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오늘의 두 번째 문제를 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감옥에 가지 않는다. 사실인가요? 아닌가요. 예, 정답은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베드로나 바울을 보십시오. 감옥에 얼마나 자주 들락거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주인가요?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6장 22절~25절
“22.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群衆も二人に反対して立ったので、長官たちは、彼らの衣をはぎ取ってむちで打つように命じた。
そして何度もむちで打たせてから二人を牢に入れ、看守に厳重に見張るように命じた。
この命令を受けた看守は、二人を奥の牢に入れ、足には木の足かせをはめた。
真夜中ごろ、パウロとシラスは祈りつつ、神を賛美する歌を歌っていた。ほかの囚人たちはそれに聞き入っていた。

이 차꼬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족쇄입니다. 지금 바울과 실라는 옷이 벗겨지고는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발에는 족쇄까지 채워진 채로 깊은 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몸 여기저기가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 발이 묶인 채로 감옥에 갇힌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절망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할 법했습니다만,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힘차게 큰 소리로 찬송을 했겠어요? 지금 있는 곳이 감옥이라고 하는 점도 있겠지만, 지금 그럴 기운도 없습니다. 간신히 나오는 목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그리고 간신히 숨을 쉬면서도 하나님을 찬송했겠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뭐라고요? 예, 이를 다른 죄수들이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들의 찬송을 막거나 따라 부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절망 중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의 이웃을 원망하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있을 때, 그들은 피범벅이 되고 눈도 제대로 안 떠지는 상황에서 헐떡거리면서도 그 기운을 하나님이나 세상을 원망하는 데에 쓰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에 바쳤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때 이 모습을 바라보는 죄수들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워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하고도 놀라운 전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단순히 목사한테만 주어진 것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꼭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데려오는 것만이 전도가 아닙니다. 첫째도 둘째도 하나님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을 해서 예수님을 전하고 성경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이웃들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평소의 우리 모습이 우리 이웃의 마음을 뜨겁게 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우리가 뛰어난 말솜씨로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열매를 맺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로 한국과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과 세상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올바른 복음을 전한다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고통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놀라운 사명,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으로부터 크나큰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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